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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단 둘이 한 중국 여행기 / 김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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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강호
등록일
2012-05-11 10:55:57
조회수
8587
아들과 단 둘이 한 중국 정주 여행기





올해 13살 된 아들과 함께 2011.2.21부터 4박 5일간 중국 정주로 여행을 갔다 왔다.

이번 여행은 아내가 아들과 함께 여행을 갔다 오라며 투어티켓을 만들어 준 것이다. 사실 나는 외국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고, 그것은 공포증이 조금 있어서 이다. 그래서 외국 여행은 한국통신(KT) 회사에 다닐 때 유럽 출장으로 이탈리아, 독일 등지를 한 번 다녀 온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평소 역사를 좋아한 나로선 기회가 된다면 중국은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두려움도 있었고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마음이 썩 생기지 않아 가지 않고 있었다. 이번엔 하도 아내와 딸들이 사랑하는 아들과 단 둘이 오붓하게 갔다 오라고 해서 마지못해 응했다.

여행지를 중국 정주를 택한 이유는 "중국의 100년에 역사를 알고 싶다면 상하이를 둘러 봐라. 또 500년의 역사는 베이징을, 3000년의 역사는 시안을, 5000년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정주를 가보라" 는 말이 있고, 정주는 중국의 고대 왕조가 가장 많이 배출된 지역이자 중국의 갑골문자가 시작된 곳이라는 것이고, 또 나의 중. 고등학교 시절 소림사 영화를 보고 흉내를 내며 놀았던 추억들이 있어 소림사를 직접 보고 싶었고, 아들에게 소림사 무술을 하는 또래 아이들을 보여주면 좋겠다 싶어 이 장소를 택했었다. 여행을 가는 전날, 저녁 늦게 둘째 딸이 배가 아파 강남성모병원에 갔는데, 맹장이라 하여 새벽 6시에 수술을 했다. 그 날 저녁은 잠을 설쳤고 이런 사항에서 여행을 가려니 썩 좋은 기분으로 출발하지는 못했다.

반포동 집 앞에서 인천공항 가는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3시경쯤 되었다. '모두투어' 여행사를 먼저 찾았는데, 너무 일찍 와서 인지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먼저 은행을 찾아 중국 돈과 달러로 환전하고 통신회사로 가서 핸드폰을 로밍 신청을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여행사 안내대로 가니 그때서야 같이 갈 일행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여행사가 교부하는 자료에 기록하고 설명을 들었다. 여행을 같이 갈 사람이 나를 포함해서 총 11명이었다. 일행 중에는 방배동에 사신다는 대학 교수로 예편한 70살 된 노신사 한분, 목포에서 중학생 딸과 함께 온 남자 분, 서울 대학로에 사신다는 여자 네 분들, 강원도 고성에 사신다는 부부들이었다.

공항 대기실 안, 나와 똑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갈 한국인 여행자들로 북적 그렸다. 비행기는 약 30분 정도 지체되었고 유리창 너머로 보니 정주로 갈 비행기는 대한항공으로 180석 자리쯤 되어 보이는 작은 비행기였다. 아들은 큰 비행기가 아니고 작은 비행기라며 실망하며 섭섭해 했다.

비행기의 자석은 비행기 중간쯤 되는 곳으로 아들과 내가 떨어져 앉는 자석 배치라 손님에게 양해를 구해 같이 앉았다.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서 그런지 비행기가 이룩할 때쯤 불안함이 음습해 왔고 마음으로 다스려 보려고 애를 썼다. 조금 있으니 저녁 기내 식사가 나왔다. 불고기 백반과 빵, 음료수였고 아들과 나는 입에 맞지 않아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비행기는 2시간 반 정도 날아가 정주에 도착했고, 바깥을 보니 어두운 저녁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수속을 받고 짐을 찾아 출구로 나오니 머리를 빡빡 깎고 양복을 말끔히 입은 '모두 투어' 직원이 티켓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나누어 준 여행 계획서에 쓰여 있는 가이드 이름을 보고 "혹시 가이드 엄지이씨 됩니까?" 라고 물었고 경상도 억양이 약간 섞인 한국말로 그렇다고 말했다. 정주 공항에서 우리 일행 외 10명이 더 있었고 여행할 일행은 총 21명으로 이들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일행들과 공항을 나와 가이드가 준비해 온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자기소개와 간단한 오늘 일정을 설명했고, 10분쯤 가면 저녁 먹으려 식당에 갈 것이라 했다. 식당은 공항 근처에 있었고 규모는 제법 있어 보였고 한자로 된 큰 간판과 큰 등으로 치장하여 붉은 빛을 밝히고 있었다.

식당 안엔, 테이블은 둥글고 테이블 가운데는 유리로 된 테이블이 돌아가고 그 위에 음식들을 올려놓고 각자 돌려서 적당한 양을 떠서 먹는 구조다. 음식의 가지 수는 열에서 열 두 가지쯤 되는 것 같았고, 양은 둥글고 큰 그릇에 푸짐하게 담겨 있었고, 맛은 향이 너무 많아 처음 먹기에는 거북했다. 그래서 그 날은 모두들 약간씩 맛을 보는 느낌으로 먹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고, 숙소까지는 약 1시간 넘게 달렸던 것 같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자기소개와 이번 여행할 여행지를 열심히 설명을 했고, 나의 귀는 가이드 소리에 맞추고 눈은 차창너머로 신기한 듯 이리 저리 정신없이 눈을 돌리며 들떠 있었다. 가이드는 고향이 중국 연변이고 조상이 한국인이라 했다. 연변에는 아직 부모님이 생존하고 계신단다. 그리고 가이드 나이는 34살 이고 가이드 생활은 올해로 12차가 된다고 했다. 가이드 일을 잘해 약 한달 전에 한국으로 포상 휴가를 같다 왔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차창너머에는 그렇게 보고 싶던 중원의 땅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고 정주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몇 년 전 김정일이가 광저우를 보고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실감하듯, 여기도 웅장한 건물들이 빽빽이 솟아 있었고 건물 꼭대기에는 크고 웅장한 한자 간판에 붉은 불빛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숙소는 정주역 바로 근처에 있었고, 정주역의 광장은 서울역의 4배 정도의 크기였고, 그 광장에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이드는 설날이 20일이나 지났지만 설에 고향 갔다 되돌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표를 사기 위해 3일씩 5일씩 줄을 서고 선잠을 자고 하는 것이 매년 한 달 넘게 저런 풍속도를 연출하곤 한단다. '사람 홍수다.' 란 말을 이런데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호텔 숙소는 9층으로 숙소 안에는 1인용 침대가 두 개 배치되어 있었고 실내는 조금 추웠다. 정주는 우리나라보다 1시간이 늦다. 정주시간으로 아침 6시 반에 기상하여 7시에 아침을 먹었다. 식당은 1층에 있었고, 호텔식이라 빵과 계란 프라이와 죽으로 간단하게 먹었다.

오늘 일정이 빡빡하여 아침 8시에 준비된 버스에 올랐다. 오늘 여행지는 정주에서 버스로 2시간 반이나 가야 하는 '운대 산'이다. 버스 안에서 바라 본 정주의 거리는 정말 무질서 그 자체였다. 신호등은 없고 있어도 지키지 않고, 길거리며 차도며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자동차와 자전거 오토바이들, 그리고 특이한 삼륜차들이 서로 얽히고 설 키고 서로 먼저 고개를 내미는 것이 우선이다. 이것을 차에서 보고 있노라니 내가 진땀이 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고 없이 서로서로 잘도 피해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짝이 없다. 많은 경찰(공안)들이 이것을 보고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이것이 중국의 교통 문화인 것 같았다. 하여튼 지금의 중국 경제수준 등을 생각해 볼 때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문이다.

오늘의 날씨는 햇볕이 있는 날이다. 그러나 하늘은 뿌연 연무현상으로 기분 좋은 날씨는 아니다. 가이드 말로는 이런 연부현상이 1년에 약 200일 가까이 이런 날씨이고, 그나마 오늘이 좋은 날씨 측에 든단다. 이런 연무현상은 이 지역이 분지라는 특성도 있겠지만, 더 큰 것은 이곳은 옥수수를 많이 심어 동시 다발적으로 옥수수 대를 태우는 바람에 그 연기가 연무현상을 유발시킨단다. 그래서 옥수수 대를 태우는 사람들에게는 법으로 다스리고 있단다. 이런 날씨를 보고 있자니, 우리나라의 청명한 하늘을 보며 살고 있다는 것에 큰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야겠다.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니, 한없이 펼쳐진 광활한 평원이 나타난다. 저 평원을 바라보니 역사에서 왜 이곳이 중원이라 했는지 알 것만 같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은 산 같은 것은 하나 없이 마냥 펼쳐진 거대한 벌판뿐이다. 보리밭인지 밀밭인지 모르지만 파릇파릇 새싹이 솟아나 있고 수로 옆에는 잎 새 떨어진 앙상한 버드나무가 일직선으로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심어져 있다. 가끔은 황토 땅들이 빗물에 씻긴 듯 깊이 패여 강줄기처럼 길게 널어져 있는데, 그곳에는 물은 하나도 없고 버드나무들만 심어져 있다. 황토 언덕에는 여기저기 땅굴들이 동그랗게 파여 있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집이고 또는 창고로 사용한단다. 역사에서 보면, 이 중원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처절한 싸움을 얼마나 했던가. 특히 삼국지에서 유비가 이 중원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며 수없는 전투를 치렸지만, 끝끝내 차지하지 못하고 죽었고, 이 중원의 주인은 조조의 차지었다.

운대산에 도착했다. 운대산(雲台山)은 명산으로 유네스코에서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는 관광지이다.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홍석협(紅石峽)'이 여기에 있다. 이곳을 보기 위해서는 내부가 굉장히 넓어 셔틀버스를 타야 한다. 굽이굽이 돌아 20분가량 가면 홍석협을 먼저 보게 된다. 이 협곡을 보기 위해서는 직각으로 된 좁은 계단을 위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이곳에는 세월과 자연의 힘으로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붉은색 바위가 깎이어 굽이굽이 거대한 협곡을 만들고, 협곡의 아래로 놀랍게도 파란 색체를 띤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정말 장관을 이룬다. 협곡을 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10분가량 왔던 곳으로 되레 내려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오후에 운대산 관광을 했다. 운대산은 36개의 영봉을 품고 있는 거대한 바위산이다. "중국 최고의 명산은 장가계"라고들 하지만 정작 중국인들 중에는 운대산을 최고로 치는 경우가 많단다. 산 안에는 폭포와 호수뿐만 아니라 기암괴석과 동굴 등이 산재해 있는데 겨울이라 나무가 앙상하여 괴석들은 더 뚜렷이 보이게 뎄고, 부연 하늘이 기암으로 된 산봉우리 풍경을 숨겨 놓아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아들과 나는 시간이 촉박해서 급히 계곡 쪽으로 올라가면서 사진 찍기에 바빴고, 계곡 끝을 마지막으로 보고 급히 하산 했다.

하산하여 버스를 타고 낙양으로 이동했다. 저녁은 황재가 먹었다는 황재 밥상으로 식사를 했다. 식사 후, 발마사지 시간이었는데 아들과 나는 발마사지를 하지 않았고, 별도의 방에서 일행들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약 1시간 반 후 호텔로 이동했다.

둘째 날, 이 날도 일정상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다음 여행지로 8시에 출발 했다. 낙양의 낙하 강을 버스로 건너면서 그 유명한 노래가 생각나 혼자 흥얼거렸다. "낙양성 십리 허에 / 높고 낮은 저 무덤은 /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 저기 저 모양 될 터이니 /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성주풀이>라는 노래다. 이 노래를 흥얼거리다 비운으로 돌아간 의자왕이 생각났다. 백제가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멸망당하고, 660년 9월에 이곳 낙양으로 압송되다가 망국의 한을 달래지 못한 채 곧 병사한다. 그의 무덤을 이곳 낙양시 ‘북망산’에 묻었다. 그리고 이곳 낙양에는 백제 장수 흑치상지의 무덤과 당시 당나라에게 폐망한 진나라 왕들도 역시 볼모로 잡혀왔다가 죽고 이곳에 무쳤다. 그리고 관우의 무덤도 이곳 낙양에 있고, 동탁도 이곳에서 죽었다. 이런 이유에서 이 노래의 가사 말을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이곳 낙양 땅은 기원전. 후로 하여 약 1600년 가까이 도읍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낙양 땅 어디를 파든 유물이 마구 쏟아진다고 한단다. 버스는 한참을 달려 중국차를 파는 곳에 들렀으며 차 한 잔 얻어먹고 차는 집에 많이 있어 사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달려서 중국의 역사상 유일한 여자 왕 당나라시대의 그 유명한 측천무후가 숨쉬는 '이하(伊河)강과 용문석굴'에 도착했다. 이 석굴은 낙양 교외를 흐르는 이하 강 옆의 암벽을 따라 약 1.5km에 걸쳐 조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때 조성된 것으로 암벽을 따라 벌집처럼 늘어져 있으며 2300여 개의 석굴이 조성되어 있었고, 내부에 총 10만 점이 넘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불상의 크기는 천차만별이고 이 불상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오랜 세월에 방치된 듯 불상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이 많았고, 이외에도 도굴 단에 의한 불법반출,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얼굴, 팔 등의 파손 흔적도 뚜렷하였다.

불상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대형 비로자나불을 들 수 있다. 폭 35m 석굴 안에 있는 대불은 전체높이가 17.4m에 이르며, 수려한 용모에 인자한 웃음이 인상적인데, 건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총 80만 명에 달하는 인력을 투입해 24년에 걸쳐 건설했다니 정말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감탄스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난 이천년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하고, 바위의 징 자국을 만지니 수많은 사람들의 돌 빚는 쇠망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석굴을 뒤로 하고 걸어서 이하강 다리를 건너 강 반대편에서 용문석굴의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고, 측천무후가 자주 들렸다는 ‘잠계사’를 보고, 당나라 때, 그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노년에 오랫동안 기거했다는 곳들과 백거이 무덤을 보고 급히 산에서 내려 왔다. 백거이의 유적지는 기거 했다는 절과 무덤밖에 없었고, 스쳐지나 듯 급히 왔지만 그 분의 발자취가 내 마음속에 잔잔히 맴돌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했다. 뒤 돌아 오면서 생각나는 백거이의 시 한수가 생각나서 넘실대는 이화 수 강물 위로 시 한줄 뿌려주고 왔다.
.........
헤어질 무렵 간곡히 다시금 전할 말 부탁했는데
그 말 중에는 두 사람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다.
칠월칠석날 장생전에서
밤 깊어 사람 없자 은밀히 속삭였던 말
하늘에선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里枝)가 될 지리다.
하늘과 땅도 그 끝이 있고 시간도 다함이 있으나
이들의 슬픈 사랑의 한(恨)만 길이길이 다함이 없으리.
((이 시는 백거이의 가장 유명한 시 '장한가' 중에서 당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
사랑을 소재로 지은 시인데, 당대 사람들도 많이 암송을 했다.
특히, 기녀들은 이 시를 전부 암송할 줄 알면 화대에 올라갔다고 한다.))

백거이는 누구이던가? 백거이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이백'이 죽은 지 10년, '두보'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800년 29세로 진사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장한가》가 유명하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시가 고급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외지로 외지로 좌천하게 된다. 그 시절 인생에 대한 회의와 문학에 대한 반성을 거쳐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명시 《비파행》이다.

그는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백거이의 시 구절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대와 결혼한 지 오년도 못되어 정 깊던 우리 둘 멀어질 줄 몰랐네, 예부터 늙어지면 서로가 등진다고 옛 미인들도 원망하고 후회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늙지도 않았는데 그대 마음 변했네.……. 이렇듯 그의 생애와 결혼 생활이 여러모로 순탄치가 않았던 것 같다. 그러한 아픔 속에서 절절하고 애절함이 마음을 파고드는 좋은 시로 탄생된 것이 아닌가 한다.

58세가 되던 해, 이곳 낙양에서 살기를 결심하고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나날을 보냈다. 옛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낙양 교외의 용문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71세 때 모든 관직에서 퇴직하고 이듬해 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생존에 이미 그의 시는 민중 속에 파고들어 소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에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 붙여지기도 하였으며, 멀리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한국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널리 애송되었다. 현존하는 작품 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장한가》《비파행》《유오진사시》는 불멸의 걸작들로 꼽는다.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달려서 소림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다. 소림사 입구에 도착하니 웅장하게 만든 돌문이 서 있었고, 세운 데는 요 근래에 세운 것 같았다. 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13.4세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저로서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 1달러를 아이에게 주었다. 그 아이는 고맙다는 눈빛으로 한참을 나를 쳐다보다가 갔다. 아직도 그 아이의 눈빛이 선하다.

숭산에 위치한 소림사는 중국 제 1의 선종 사찰이자 소림파 무술의 발원지다. 소실산 아래의 무성한 숲 속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소림사'란 이름이 붙었다. 소림사는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세웠다고 한다. 달마대사는 소림 무술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9년간에 걸친 면벽(面壁) 수련을 마친 후 신체가 쇠약해지자 건강 회복을 위한 신체수련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점차 발전돼 소림파 무술의 일부가 됐단다. 소림사는 전성기인 당나라 때에는 궁전 같았고 스님도 2500명이나 됐다고 한다. 스님들은 각종 무기와 무예에 능해 당 태종 이세민을 돕기도 했단다.

입구에서 표를 내고 아스팔트길을 15분 정도 걸어서 무술 쇼를 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현대식 걸물이고 홀 가운데에 무술 쇼를 하는 네모로 된 단상이 설치되어 있었고, 약 200석 정도로 빙 둘러 앉는 의자가 배치되어 있는 구조였다. 이날의 관중들은 90% 이상이 한국인들이었다. 무술 쇼를 하기 전 무술 하는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 순서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찍었는데 제 아들도 한 번 찍으라고 했는데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라 죽어도 안 찍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무술은 약 40분가량 이어졌고, 제 아들도 많이 신기해했다.

무술 쇼를 보고 급히 소림사로 10분가량 걸어서 갔다. 소림사는 크게 불 것은 없었다. 소림사를 보고, 영화에서 많이 보던 스님들의 무덤 탑들을 둘러보고, 내부에만 운행하는 차를 타고 숭산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한 칸에 네 명씩 타는 케이블카였다. 제 아들은 가이드와 함께 타고 나는 다른 일행과 함께 타고 올랐다.

케이블카는 숭산 중간 능선까지 올라갔고 숭산의 웅장함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가이드가 1시간 반을 줄 테니 각자 산에 갔다 오라고 했다. 산길은 숭산의 허리를 따라 돌계단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길을 20분쯤 가니까 90도 직각으로 우뚝 선 거대한 하얀 바위산들이 위용의 이빨을 드러냈다. 그 바위산 중간을 가로질러 끝 모를 길들이 이어져 있었고, 그 길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 길을 걸어가는데 처음에는 오금이 시려 제대로 걸어 갈 수가 없었고, 그 밑을 보니 천 길 낭떠러지라 어지러워 밑을 처다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산을 많이 보고 산을 많이 탔지만 이런 산은 처음이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이 길을 내기 위해서 산 위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공사를 했단다. 아들에게 걸어갈 때 바깥쪽으로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조심조심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아들과 사진을 연신 찍었고 감탄을 연발해댔다. 내가 일행 중에 맨 먼저 앞 장을 서서 갔고, 중간쯤 가다가 시간이 부족하여 아쉬움을 뒤로 하고 되돌아 왔다. 타고 온 케이블카로 하산을 했고, 내부 차량으로 버스가 있는데 까지 타고 왔다.

낙양의 일정은 이렇게 해서 모두 끝나고 정주로 되돌아 왔고, 첫날 잤던 그 호텔로 돌아 왔다. 다음 날은 오전에 정주시내에 있는 박물관을 보고, 오후에는 정주 근교에 있는 온천장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시간적 여유가 있어 다음날 아침은 9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이 날 저녁 9시경, 가이드 안내로 일행과 함께 정주 야시장 구경을 갔다. 그 야시장에 도착하여 아들과 나는 손을 꼭 잡고 이리저리 구경을 하고 다니다 아들 mP3용 이어폰을 중국 돈 10위안을 주고 샀다. 살 때에 말이 통하지 않아 먼저 물건을 잡고 물건에 손가락을 지시하며 얼마냐고 눈빛으로 쳐다보니 손가락으로 열십자로 표시하기에 "10위안? OK" 이런 ‘보디랭귀지’로 물건을 샀다. 그리고 구경을 더 하다가 작은 드라이버 세트를 노점에서 파는 것을 보고 좀처럼 했던 대로 10위안을 주고 샀다. 아들은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mP3를 꺼내 들어보고는 소리가 잘 들린다고 환호성을 질러 댔다.

셋째 날, 아침 8시경에 오늘 온천을 하기 위해서 수영복을 사려 일행과 함께 가게에 들려 수영복 두 개에 60위안을 주고 샀다. 그리고 정주 시내에 있는 상나라 유적지에 잠깐 들렸다. 흙으로 된 성벽밖에 없었다. 하기야 상나라라 하면 중국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국가이고, 지금으로부터 3600년 전의 나라가 아닌가. 이런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에 놀랍다. 그리고 박물관에 들렸다. 이 박물관에는 주로 기원전의 유물이 수두룩했으며 너무 많아 그냥 포개 놓은 느낌을 받았다. 주로 철기 유물이 주류를 이루었고, 특히 책에서 배운 한문 시초 문자 뼈에 새긴 ‘갑골문자’를 실물로 보았다.

그런 다음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내내 온천만 했다. 온천은 노상 온천이고 탕이 60개가 넘었다 돌아가면서 한 번씩 온천을 해 보았다. 시설은 그렇게 썩 좋은 시설은 아닌 것 같았다. 아들은 온천은 하지 않고 가이드와 함께 pc 게임에만 열중 했고 끝날 쯤 아들 얼굴을 봤다. 아들은 나를 보고 pc가 정말 구형이고 속도 장난 아니게 느렸다고 오히려 짜증을 내었다. 그리고 어제 잤던 그 호텔로 되돌아 왔다.

넷째 날, 허난 성 포청천과 북송 수도로 유명한 개봉 시로 갔다. 이곳 개봉은 역사상 7차례나 황하강의 범람으로 도시가 완전히 수몰되었다. 역대 왕조의 도성들이 차례로 수몰되어 마치 시루떡처럼 한층, 한층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래서 오늘날 개봉은 일개 지방 도시로 쇠락하고 볼만한 유물들이 중국의 5대 고도에 비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역대 왕조의 궁전과 도시들이 지하에 그대로 매장되어 있으므로, 고고학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개봉은 정말로 살아 있는 박물관인 셈이다. 개봉 사람들은 언젠가는 발굴을 단행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개봉이 다시 한 번 세계적 관광지로 부상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개봉시의 포청천 사당에는 그가 개봉부윤으로 부임 시 받았다는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가 실제 이곳에 현존하고 있었다. 작두는 사형 집행 시에 쓰던 것이란다. 그리고 사당에는 포청천을 신으로 숭배하는지 향불이 수없이 타고 있었고 많은 중국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포청천은 송나라 때의 문신이자 유명한 정치가로 개봉부윤으로 재직 중의 공정한
판결로 유명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1994년에 KBS에서 방송한 홍콩 드라마 『판관 포청천』이다.

포청천은 999년에 태어나, 1027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관직은 개봉부윤을 거쳐 지간 원으로 재직 중 최고 권세를 휘두르는 귀인 장 씨의 인척 장요좌를 탄핵하고 작두로 사형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사당 안에는 이런 장면을 연출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있었다. 이렇듯 재직 중 고관대작을 가리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내렸으며, 또한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부패와 비리를 추상같이 척결하여 이름이 높았다. 그러다 1062년 향년 63세로 개봉에서 병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음 장소는 송나라 때 일반 상점들이 있는 골목을 보았다. 200m 정도의 길을 따라 황궁 입구와 일직선으로 늘어진 송나라 때로 추정되는 건축물들이 있었고 가이드의 말로는 그 때의 건물이라 하는데 사실은 1990년에 북송의 수도 거리의 일부를 재현해 놓은 것이란다. 이곳의 한 중심에 '고려의포(高麗醫鋪)' 라는 병원이 눈에 띄었다. 당시 북송과 고려는 밀접한 우호 관계에 있었고 양국은 활발한 교역을 하였는데 수입품은 비단·자기·약재·악기·향료·종이·붓·먹 등이었고, 고려의 수출품은 금·은·구리·인삼·잣·모피 등 이었단다. 당시 고려의 국가명이 지금의 영어로 된 'KOREA' 가 아니던가. 그리고 이 근처에서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식사 후, 북송 황궁을 보았다. 북송은 960년에서 1126년까지의 중국 왕조 중 하나이다. 이곳 개봉(開封)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이다. 국호는 송이었으나, 금나라에 의해 개봉에서 쫓겨나 남하한 뒤에 남송으로 재 부흥했고, 북송과 남송을 통틀어 송나라라고 한다.

북송의 멸망, 8대 황제 휘종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춘 군주로써 그의 회화는 북송시대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도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측근들의 비리로 재정이 바닥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신법'을 이용하여 증세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민중반란이 일어났고 이 시기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수호지』이고, 수호지의 활동무대가 이곳이다.

이때 북쪽의 만주에서 여진족은 '요'(거란)의 착취에 대항해 부족이 단결하여 1115년 스스로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금'이었다. 그러자 송의 정부는 금에 대해 공동으로 요를 공격하자고 협정을 맺고, 출병하여 요를 멸망시켰다. 멸망을 시킨 후 금의 군대가 하도 약탈을 일삼자 송은 다시 요의 잔당과 손을 잡았고, 이것을 안 금은 이곳 개봉으로 쳐들어와 1127년 함락시켜 버렸다. 황재의 동생 조구가 급히 남쪽 항주로 도망쳐 황제를 선언하고, 송을 재흥하였다. 이것이 바로 '남송'이다.

북송의 황궁 터에는 황궁 치고는 너무 초라하고 넒은 호수와 정원들뿐이었다. 그럴 것이 이 왕궁은 청나라 때 1734에 하남총독 왕사준이 이곳에 만수궁을 지어 황제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곳을 용정(龍亭)이라 하고, 용정 안에는 송 태조가 황위에 오른 뒤 문무백관들과 함께 대연 회를 베푼 모습을 수준 없이 재현해 놓았다. 이곳에서 아들에게 추억 하나라도 더 담아주기 위해 사진을 찍자고 하는데 아들은 "내가 사진 찍으려 왔느냐?" 고 인상을 쓰며 나의 성질을 있는 대로 돋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마대사의 사리탑이라는 팔각으로 된 13층 철탑을 둘러보았다. 이 철탑은 송나라 때 건립한 것으로 천 년의 인고에 세월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꿋꿋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개봉 사람들이 이 탑에 더욱 진한 애정을 느끼는 것이다. 이 철탑은 벽돌로 지워졌지만 오랜 세월로 그 표면이 마치 녹슨 철처럼 보인다 하여 '철탑'이라고 부른단다. 이것의 끝으로 개봉시를 떠났다.

정주로 오는 차창너머에는 처음에 와서 보았던 웅장하고 광활한 중원 땅이 펼쳐지며 한없이 지나간다. 저 중원의 벌판을 바라보면서 중국의 장대한 역사가 떠오르고, 어릴 적 읽었던 삼국지와 수호지가 생각나고, 포청천 드라마가 생각나고……. 저 중원의 땅을 호령하며 말을 타고 누볐을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벌판 위로 질서 없이 포개졌다 사라졌다 한다.

나의 어께에 기대고 곤히 잠 던 아들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아빠와 함께 한 이번 여행에서 이아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삼국지를 너무 좋아해 10번 이상을 읽어 훤히 외우다시피 했는데, 저 중원의 땅을 보고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제갈량, 조조를 상상하며 떠올렸겠지, 그리고 이아들이 살아갈 삶 속에서 어떤 의미로 어떤 추억으로 간직할까? 아빠와 함께 한 이 모든 시간들이 가슴 깊이 낙인 되어 먼 훗날 가끔씩 좋은 추억으로 더듬곤 하겠지, 아들아! 저 중원의 땅을 봐라, 너도 저 중원의 땅처럼 넓고 광활한 가슴을 가져라, 그리고 마음껏 말을 타듯 저 넓은 세상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거라!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이번 여행에 대해 하나하나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주었고 많은 아쉬움을 표했고, 마지막으로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우리들을 향해 불러 주었다. 가이드가 하필 이 노래를 우리들에게 불러준 그 의미는 무엇일까?……. 그의 노래를 듣고 있지나 왠지 마음이 짠해 오는 느낌을 받았으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미련 같은 아쉬움에 자꾸만 창 너머로 눈길이 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니, 백거이 시 한수가 연한 연기처럼 펴지고 있었다. 꽃은 꽃이 아니고/안개는 안개가 아니로다./깊은 밤 찾아와/날이 밝아 떠나간다./찾아올 땐 봄날 꿈처럼 잠깐이건만/떠나갈 땐 아침 구름처럼 흔적도 없어라…….
(2011.3.2일 김기환 씀)
작성일:2012-05-11 10:55:57 121.135.2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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