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나는 제주 올레길>(14) '돈내코 계곡과 선인장마을'

<혼자 떠나는 제주 올레길>이 글은 '갯가' 시민기자님이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제주 올레길을 도보로 여행한 뒤 자신의 블로거에 올린 것으로, 이를 일부 고쳐 뉴스사천에 다시 올려주셨습니다. -편집자-

오늘도 어김없이 나는 오전 6시에 잠에서 깼다. 그리곤 일어나 어젯밤 가보지 못한 돈내코 계곡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고, 이름 모를 산새만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이내 돈내코 계곡에 도착하자, 혼자 체조를 하며 몸을 풀었다. 신선한 돈내코 계곡에서 아침을 맞으니, 어젯밤 힘들게 이곳까지 올라온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른 아침, 돈내코 계곡에서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모습.
▲ 돈내코 계곡 내 원앙폭포. 오래전 혼자서 제주도 배낭여행 할 때 여기서 맥주 마시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돈내코 계곡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야영장으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어제 저녁 남긴 밥에 물을 붓고 끓인 다음 김치와 함께 아침을 해결했다. 이후 배낭을 챙겨 작년 여행 때 마지막으로 다녀온 13코스 종점까지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여기서 택시를 타면 요금이 많이 나올 것 같아, 가까이 갈 수 있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서귀포행 버스가 지나가 버린다. 애고~ 아까워라. 1000원이면 해결되는데.. 어제 올라올 때도 버스 한 대가 지나가더니.. 하지만 집 떠난 나그네가 이 정도 고생이야 이미 각오하고 온 게 아니었나고 생각해 본다.

버스정류장에서 서귀포까지 다시 버스를 갈아탄 다음, 중문을 지나 모슬포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작년 올레길 여행 때 모슬포 재래시장 식당에서 먹은 '보말 칼국수'다. 그 때 먹은 보말 칼국수는 맛이 참 독특하면서 내 입맛에 맞았다. 그 때는 아마추어 가수의 공연까지 덤으로 구경할 수 있었던 게 생각난다.

길을 물어 그 식당엘 겨우 찾아 갔더니, 이런! 오늘은 휴업이란다. 어떡할까 고민하다 일단 올레안내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14코스 종점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지 아니면 택시를 타야만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이곳에서 약 10분 정도 걸어 올레안내소에 도착했지만, 아뿔싸.. 오늘은 여기도 휴일이란다.

졸지에 믿는 도끼에 두 번이나 배신을 당한 기분이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멍청하게 길에 서 있다가 무작정 걷다 보니, 저기 멀리 돼지국밥집이 보인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점심식사부터 해결하자'라는 생각으로 국밥집에 들어갔다. 이후 막걸리 한 통에 돼지 국밥을 시켜먹은 뒤, 주인아주머니께 저지마을로 가는 교통편을 물었다.

아주머니는 저지마을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서너 번 다닌다고 말해준다. 나는 어쩔수 없이 택시를 불러, 작년 올레여행 마지막 종점이었던 저지마을 회관에 도착했다. 감회가 새롭다. 저지마을은 작년까지 올레길의 마지막 코스였지만, 현재는 14-1, 15, 16, 그리고 추자도 18-1코스까지 개장됐다.

▲ 올레길 종점 저지마을 회관 모습.

도착하니, 시계는 12시를 향하고 있었다. 뙈약볕 아래 나는 저지마을을 출발, 올레길 14코스를 시작했다. 마을길을 지나고, 들판을 지나고, 온통 잡풀 사이의 길을 걷다가 잠시 소나무 숲에서 쉬었다. 그리곤 다시 지루하고 외로운 길을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발바닥 물집이 터진 흉터을 피해, 다른 발바닥에 힘을 주다 보니 다른 곳에 물집이 생겼다. 허벅지도 땀에 젖은 팬티에 쓸려 벌겋게 달아 오르고, 풀밭의 가시 덩쿨은 사정 없이 발목을 할퀸다. 팔도 퇴약볕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 오른다. 심지어 내 몸 가운데 그 녀석도 젖은 팬티에 쓸려 쓰려온다. 아예 떼 두었다가 다시 가져오면 안 될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 저지마을에서 출발하니 잡풀사이 희미한 길이 나온다.
▲ 부르터고, 할퀴어진 불쌍한 내 두 다리

도저히 이대로 길을 걸을 수 없어, 그늘 아래 잠시 쉬다 가기로 했다. 물집 잡힌 발에는 1회용 밴드를 붙이고, 벌겋게 익은 팔은 긴팔옷으로 덮은 뒤 다시 출발했다. 저지마을을 출발한 뒤 3~4시간 동안 사람 한 명 구경하지 못한 채, 바닷가 근처 선인장 마을에 도착하니 그렇게 사람이 반가울 수가 없다. 나는 마을 정자 밑에 드러 누워,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다 잠시나마 달콤한 낮잠을 빠졌다.

▲ 잠시 쉬어간 선인장마을

달콤한 낮잠에서 깬 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저지마을 출발한 후부터, 시원한 캔맥주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도대체가 몇 개의 마을을 지나쳐도 가게가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 간판이 보이지만, 가보면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다. 맥주를 들이키고픈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얼마나 걸었을까? 금릉해수욕장 입구서 작은 가게 하나가 보였다. 나는 곧바로 가게에 들어가 냉장고에 있는 캔맥주 한 개 따고, 목구멍으로 콸콸~ 넘겼다. 그 맛을 무엇에 비할수 있을까? 잠시 후 가게 주인이 따라 나오시는데, 연세가 아주 많으신 할머니다.

이어 가게에 주저 앉아, 30여 분간 할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대화 중 절반 정도는 내가 알아 들을 수 없는 제주도 사투리였다. 뭐 대충 정리하면..할머니 연세는 올해 90세이고,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일제에 끌려 갔다고 한다. 그 후 남편은 강제로 배를 타서 7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남편이 죽은 줄 알았는데, 어느날 한 쪽 손목이 없어진 상태로 나타났다고 한다. 돌아온 남편은 장애를 딛고 참고 오기로 더 열심히 일해서, 과수원도 일구고 자식들한테도 재산도 많이 물려주었다고 했다. 한편 할머니는 할 일이 없어 가게를 하고 있고,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손님과 대화하는 일이 즐거움이란다.

▲ 영화에 나올 법한 70-80년대식 할머니 가게.
▲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여쭙자, 수줍게 승락하시면서 단정하게 포즈를 취하신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끝낸 뒤, 나는 금릉 해수욕장과 협재해수욕장을 지나 목적지 한림항으로 걸었다. 출발시간이 늦어 이미 해가 넘어간다. 내 그림자가 길가는 방향 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해지기 전에 도착하라고 나를 재촉하는 것만 같다. 나의 오늘 최종 목적지는 한림항의 비양도 선착장인데, 내가 한림항에 들어 설 즈음 이미 해는 바다 뒤로 넘어가버렸다. 날이 어두어지자 올레길 표식을 찾을 수 없었다. 대충 지레 짐작으로 목적지로 걸었다. 마음은 바쁘기만 한데, 몸은 피곤하다. 이어 한림항에 있는 비양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나는 한 동안 멍청하게 주저 앉아 있다, 정신을 차리고 숙소를 찾아 나섰다. 이곳에서 야영은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리저리 여관을 찾아 거금 3만원에 묵을 거쳐를 맡기고, 올레길 세번 째날 하루 일정을 마쳤다.

▲ 비양도 일몰.
▲ 최종 목적지 비양도 선착장.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원고료를 지급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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