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권력은 항상 희생양을 찾는가?

지난 일요일 새벽 (2012년 6월 17일) 로드니 킹이 자신의 집 수영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1991년, 그가 네 명의 LA경찰에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는 장면은 카메라에 그대로 잡혀서 이 후에 네 명의 경찰이 무죄로 풀려나자, 이에 분노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많은 한인 교포들이 엄청나 피해를 입은 바 있다.

그의 시체는 약혼녀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부검 결과는 아직 비밀에 붙여 있다.

Rodney King was found dead at his Rialto, California, home early Sunday.
King's fiancee says she found him at the bottom of his swimming pool.
King, whose beating by Los Angeles police in 1991 was caught on camera and sparked riots after the acquittal of the four officers involved.
He was 47.

그의 폭행 사건 만을 볼 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네 명의 경찰관 중에 두 명은 이 후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로드니 킹은 소송에서 이겨 3.8 million dollar를 받았다.

삼백 팔십만 달러라면, 40억원을 훌쩍 넘는 돈이니 가히 미국식 정의의 실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하지만, LA폭동의 최대의 피해자가 주류 백인도, 다수 흑인도 아닌 한인이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미국 경찰은 비벌리 힐스에 진을 치고 흑인들이 한인 가게를 마음껏 유린하도록 방관하였다.

폭동이라고 기억하기 보다는 축제로 기억하는 인들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누구든 마음에 드는 물건 하나쯤을 장만할 수 있었을 테니...

정확한 피해 집계가 있었을 리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이기 보다는 미국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기에 우리 정부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하기에 힘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로드니 킹의 사망을 맞아 위의 비극을 회상하는 이유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묻고자 함이다.

자신에게 위기를 맞았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희생양을 찾곤 한다.

나 자신도 태어나면서부터 몸과 마음을 담고 있는 기독교도 본질적으로 희생양에 대한 기대에 근거하고 있다.

왜 우리는 희생양에 기대는가?

 

만약 내가 내 삶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도록 태어났다면, 이 세상에 홀로 던져진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은 극히 철학적이지만 삶에 근거한 실천은 아주 간단하다.

다른 이에게 손가락 하나를 지적할 때, 다른 네 개의 손가락은 나를 향하고 있음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으면 된다.

모든 손가락을 타인에게 보인다면 그것은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그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다.

뉴스 미디어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소식들도 아주 간단한 내용이다.

그들을 비난하라.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 그들이 바로 당신이 손쉽게 비난할 수 있는 희생양들이다.

하지만 그런 비난에 동참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한, 당신의 삶은 결코 한 치의 진보도 없다.

비난을 할 때는 항상 자기 자신도 그 자리에 놓아야 한다.

같은 한계를 지니고 태어난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각자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대가 없이 어떻게 우주가 존재하고,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비난하고자 하는 그 사람도 그의 우주의 중심이 아니던가?

희생양이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것이 이 모든 비극과 문제들에서 '구원'이 있다면 그것의 진정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드니 킹, 그대에게도 축복과 자비를 기원하고자 한다. 인종과 차별을 뛰어넘는 애도의 뜻을 말이다.

하지만 국가와 같은 차원의 권력이 희생양을 찾으려 할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국가 단위의 어려움을 소수 이민 노동자에게 전가할 때, 술 취한 범죄자들에게 전가할 때, 소위 종북이라는 이전의 빨갱이라는 단어가 역할 하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단위로 위협할 때, 나아가서 모든 국민의 전체적인 문제로 전가할 때...

우리는 그 비판 혹은 비난에 그저 놀아나서는 안될 것이다.

자신이 처한 모든 단체에서 지역에서 사회에서, 우리들은 결정적인 문제제기를 스스로로부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확장된 나 자신인 이 사회와 국가의 권력을 희생양 찾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비판을 통해서 보나 나은 사회의 비전을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자신의 살을 깎아 내는 아픔으로서,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음을 역사가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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