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피에타', 자본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그대로 보여줘

▲ 영화 피에타 포스터 ⓒ 김기덕 필름
영화 피에타는 자본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그대로 보여준 수작이다. “청계천을 통해 자본주의의 잠식관계”, 즉 자본이 어떻게 사회를 사람들의 삶과 세상의 골목 곳곳을 잠식하는지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바램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식구 없이 자란 강도(이정진)는 고리대금업자의 빚을 받아내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자본의 대리인이다. 재벌의 높은 빌딩과 쇼핑센터 건물이 번쩍이는 종로, 을지로 옆 낡은 청계천 마치코바 거리에서 주문도 없고 신용도 없어 사채를 쓸 수 밖에 없는, 홀로 아니면 가족들이랑 노동하는 사장들.

이자는 3개월만에 10배나 불어나고 이자를 제때 주지 못하면 강도는 그들에게 가차없는 폭력을 행사한다. 빚을 갚지 못할 경우 프레스 기계에 팔을 절단하거나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빚에 상응하는 상해를 고의로 가하여, 돈을 빌려줄 때 가입시킨 보험에서 보험금을 타낸다.

빚을 받아내기 위해 자신이 잔인한 폭행을 일삼는 것 보다 돈을 빌려쓰면서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니네들이 더 악마지”라고 말하는 것에서, 빚을 갚지 못해서 채권추심 당하는 것이 두려워 자살하는 마치코바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야만성과 폭력성을 가진 자본의 논리를 잘 표현한다.

▲ 빚을 갚지 못한 남편의 다리가 잘리는 것을 막기위해 자신의 몸을 주어 시간을 벌려는 여성. ⓒ 김기덕 필름
감독은 화폐 물신성이, 자본 물신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돋보이는 성찰을 보여준다. 아들의 복수를 위해 ‘엄마’를 가장한 여자에게 진짜 모성을 느끼면서 강도는 “돈이 머에요?”라고 묻는다. 빚을 받아내기 위해 이자를 받아내기 위해 잔인한 폭행으로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것을 일삼았던 그가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 대상,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자 돈이 아니라 세상이 무엇인지 세상에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화두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때부터 강도는 참회의 길을 간다. 이 인간적 본질에 대한 질문에 감독이 걸어가고 싶은 세상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리라. 이 질문에 미선(조민수)은 “돈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지. 사랑, 죽음, 복수…”라며 자본주의 사회, 즉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돈이, 자본이 세상을 사람을 지배하는 거꾸로 된 사회의 본질을 얘기한다.

자신이 빌려 쓴 사채 때문에 다리가 잘렸지만 강도가 뿌리고 간 돈 4만원에 술을 사먹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에 증오심은 온데 간데 없이 마냥 기뻐하는 훈철의 모습에서, 태어날 아이가 풍족하게 컸으면 하는 바램에 팔 두 개를 잘라달라는 음악을 계속했으면 더 거지 같이 살았을 것이라며 자신의 처지를 자족하는 젊은 노동자의 모습에서, 고층에서 자살하려는 늙은 마치코바 사장에게 “죽으면 보험금 수령이 복잡”해진다며 죽음 앞에서도 돈을 생각하는 강도의 모습에서 화폐 물신성과 자본 물신성이 우리의 삶에 정신에 얼마나 강력하게 철저하게 침투해 있는지 드러낸다.

이번 영화는 뚜렷하게 두 가지 미학의 특징을 갖는다. 물론 먼저 제작된 영화들에서도 어느 정도 보였던 측면이기도 하다.

먼저 ‘거친 날 것의 미학’을 가지고 있다. 폭력을 느와르 류의 영화처럼 미화하지도 않으며, 폭력의 모습을 과장하지도 않고, 축소하여 정제하거나 세련되게 윤색하지 않는다. 이전 영화에서 나왔던 폭력이 특수한 행태가 많았다면, 이번에는 고리대금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있는 그대로의 폭력과 잔인함, 그리고 폭력을 당하는 이의 두려움과 고통을 잘 담았다.

다른 하나는 ‘낯설음의 미학’이다. 살아 있는 닭을 잡아 요리하여 육식만 하는, 피묻은 닭내장을 화장실에 널브러지게 해 놓는, 자위나 섹스는 하지 않고 몽정으로 성적욕망을 해결하는, 죄값을 치루기 위해 폭력을 가했던 가족의 트럭에 자신의 몸을 묶고 트럭에 끌려가며 붉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죽는 강도라는 캐릭터는 낯설다.

갑자기 나타난 ‘엄마’라는 여자에게 거침없이 뺨을 때리며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과 엄마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생살을 도려내어 피를 뚝뚝 흘리면서 먹이는 모습, 그것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확인시키는 여자의 모습, 그 여자의 사타구니를 만지면서 음부를 손으로 애무하듯 덮치면서 ”자신이 이곳에서 나왔냐며 이곳에서 나온 것이 맞다면 들어가도 되겠느냐”며 삽입하려는 시도에 성욕을 느끼기보다 눈물을 흘리는 것에 검증을 마치는 모습은 감독 특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낯설음이다. 그래서 새로움이다.

▲ 죽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 강도에게 엄마를 가장하여 불쑥 나타난 미선. ⓒ 김기덕 필름
감독은 이 두 가지 미학의 요소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은유를 가지고 그가 생각하는 세상의 본질에 계속해서 집요하게 다가서려고 노력하면서, 그 과정에서 얻은 성찰과 관찰을 영화로 형상화하는 시인 같은 능력을 가졌다. 그것이 바로 김기덕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이고 세계의 거장이 될 수 있는 덕목이다.

영화에 한계는 있다. 엄마라는 존재가 나타난 이후 강도는 점점 인간적인 본질을 되찾는다. 이것은 사랑이 있으면 세상의 잔인함이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보다, 사람의 사랑 즉 엄마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복수하는 미선의 잔인함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존엄에 눈을 뜨게 된 것을 보여준 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존엄을 몰라서 폭력과 잔인함을 생산하는가? 문제는 자본이 스스로 가치증식하는 그 본성 속에 폭력과 잔인함을 내장하고 있고, 자본이 재생산되고 확대 재생산되는 그 운동 속에서 그것들이 일상적으로 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이 던지는 ‘극단적 개인적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공범이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은 자신이 묘사한 잔인함을 일삼은 강도와 죽음과 맞바꾸며 완벽하게 죽은 아들의 복수를 대신한 미선과 마치 예수가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히듯 트럭에 몸을 묶고 죽어가며 참회하는 강도의 모습을 통해서는 해소될 수 없다. 강도와 미선에 대한 연민은 예술에서는, 신에게는 허용될 수 있으나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에는 의미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개별인간의 인간됨과는 무관하게 잘리지 않는 쇠사슬 같은 먹이사슬의 철저한 피라미드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라미드의 가장 정점에 있는 자본의 본질과 그것의 인격화인 자본가의 모습을 담아내야 하는 숙제를 남겼다.

우리 시대의 거장 김기덕 감독에게 요청한다. 다음 영화는 자본의 본질과 자본가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서 ‘거친 날것의 미학’과 ‘낯설음의 미학’을 담아서 만들어 주기를.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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