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일류' '성장'만 강조한 결과물.. 사회구조문제 깨달아야"

 

▲ 이런 홍보성 행사로 과연 학교폭력이 척결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그렇지 않음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사진은 사천경찰서에서 학교폭력예방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모습. 기사내용과 무관)
또 생때같은 아이 한명이 학교폭력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 길을 선택했을까? 그런 또래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인 나에게는 이런 일들이 그저 신문기사로 끝나는 일은 아니다. 매번 이런 일이 생기면 당국이나 경찰은 근본대책을 수립한다며 떠들썩하게 정책을 펴지만 학교현장에 있는 학생들이나 교사들에게 체감되는 정책은 없고 대부분 일회성이나 홍보성 행사로 끝나고 만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일의 발생원인은 놀랍게도 실제 학교나 학생들에게 있지 않고 오히려 사회구조적 문제가 더 큰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사회구조적 원인은 대개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최고” “일류” “성장” “발전”이라는 단어들로 대표되는 문화를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최고” “일류” “성장” “발전”에 부합하지 않는 것에 별로 가치를 두지 않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최근에야 이러한 가치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가치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는 움직이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기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좌절과 포기를 경험하고 자신의 에너지를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하게 된다. 즉 불만, 증오, 극도의 이기주의 등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학교에서는 집단 괴롭힘, 학교폭력으로 나타나고 사회에서는 범죄, 특히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 등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러한 기본 바탕위에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경제적 양극화와 그 양극화의 그늘에서 발생되는 가족의 해체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학교현장에서 아이들과 상담을 통해 보면, 실제로 아이들을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은 그들의 성장과정에서 그들에게 가장 가까운 어른들에게 유형, 무형의 괴롭힘을 받은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가족해체로 인한 불안과 자아정체성의 상실, 건강한 가족문화와 사회문화의 학습을 하지 못한 아이들이 주로 타인을 괴롭히는데 현재의 학교폭력근절대책처럼 이 아이들을 학교에서 내 보내는 것으로 학교가 안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상황을 단순히 학교폭력근절대책 몇 페이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당국의 태도도 문제지만 근본적 원인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사회분위기는 더욱 한심하다. 물론 최근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제도를 통해 이들을 보듬으려는 노력을 해 보지만 학교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더 깊고 큰 문제는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사태는 끊임없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 전반에 팽배한 “최고” “일류” “성장” “발전”의 가치는 강요된 가치임에 분명하다. 이미 오래전에 강요되어져서 이제는 그 강요의 기억조차 희미해진 나머지, 처음부터 우리는 “최고” “일류” “성장” “발전”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런 강요의 시작은 우리의 급격한 산업화, 그리고 부도덕한 정치권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산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부도덕한 자본가와 정치권력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결탁하고 그들의 결탁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최고” “일류” “성장” “발전”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이런 가치를 통해 모두가 잘 살 수 있고 모두가 성공할 수 있다면 무슨 문제가 생길까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얇고 일회적 정책을 통해 이러한 가치의 이면에도 관심을 보이는 척 하지만 자본가와 정치권력은 그것을 오래 유지할 아무런 당위성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고” “일류” “성장” “발전”의 가치야 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가치라고 믿고 있고 동시에 최고의 이면, 일류의 배후, 성장의 그늘, 발전의 뒤안길은 당연한 것이며 그 정도의 희생은 치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속적 요구에 순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기회와 혜택을 주지 않았고 그러한 상대적 박탈감은 그들에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공동체의식과 자존감마저 잃게 만들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건강한 가족문화, 건강한 사회문화를 기대하는 것은 그 가능성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교사인 나의 경험으로 지금 학교에서 폭력으로 동료를 괴롭히는 학생들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불우한 아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그런 위기가정 혹은 결손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의 증오와 분노를 경험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자신도 그런 모습으로 성장해 왔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일말의 가책이나 양심적 갈등을 겪지 않고 동료를 괴롭히고 돈을 뺐고 폭력을 일삼는다. 교사로서 그들을 상담해보면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성장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들의 삶은 열악한 조건이 많다. 그런 아이들에게 학교의 어떠한 규칙도 사회의 어떠한 원칙도 무용지물이며 오히려 그런 규칙과 원칙을 벗어남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려는 아이들도 가끔은 보게 된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단순한 폭력, 단순한 괴롭힘은 사실 오래 전 학교에도 있었고 현재도 여전히 존재한다. 어쩌면 모든 조직에서 이러한 것은 반드시 있게 되는데 이것을 견디는가 혹은 견디지 못하는가는 개인의 적응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학교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괴롭힘이나 폭력은 어쩌면 이런 유형에 속할지도 모른다. 사회분위기에 편승한 언론들의 굉장한(?) 노력으로 침소봉대되어 알려지지만 엄격하게 사태를 분석해보면 앞서 말한 유형을 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더불어 지금의 학생들이 대부분 가정에서 혼자 혹은 두 명으로 성장한 아이들이어서 너무 귀하게 자라 어려움을 모르는 경향이 많아 조금 힘든 상황도 견뎌내지 못해서 생기는 학교폭력, 따돌림 문제도 없지는 않다. 또 어떤 경우에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도 사회분위기에 따라 교사에게 부모에게 이야기하여 문제시하는 경우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다.

 

대구에서 발생한 중학생의 자살사건으로 야기된 학교폭력방지대책의 큰 줄기에는 국가 공권력을 통해 이것을 해결하려하는 미국식 학교경찰의 개념이 짙게 깔려있다. 학교현장이 범죄의 현장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는 언론의 지대한 공헌으로 대다수의 국민들은 학교가 안전하지 못한 곳이라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무리가 없을 만큼 아이들의 폭력은 일상화 되었고 그 결과로 자살에 이르는 경우가 이렇게 생기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의 학교 현장이 그렇게 살풍경한 곳은 아니다. “최고” “일류” “성장” “발전”의 사회적 가치에 부합하는 성적지상주의로 학교가 피폐해지고, 사회구조적 원인과 과잉보호로 생긴 학교폭력 문제가 혼재되어 학교가 매우 황량해졌지만 교사로서 바라보건데 학교는 여전히 아이들의 꿈과 희망의 장소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또 그렇게 만들어가야 할 장소도 분명하다. 더 이상 학교폭력과 성적지상주의의 고통 때문에 소중한 우리 아이들이 다치기 전에 우리 모두는 이러한 “최고” “일류” “성장” “발전”의 가치만 인정되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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