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붙인 '산성공원' 대신 '수양공원' 명칭변경 큰 의미

2012년 6월 15일 사천읍사무소에서는 공원명칭변경공청회가 열려 산성공원이라는 명칭이 일제의 잔재이므로 「수양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리하여 12월 20일 수양공원으로 고시됨으로써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던 무거운 짐을 벗고 새로운 이름으로 탄생하였다. 올해 2월 사천시는 수양공원 표지석 제막식을 가졌다.

1832년에 간행된 『읍지(邑誌)』 군명조와 목태림의 「동성부(東城賦)」를 보면 사천의 지명은‘사물, 사수, 사주, 사천이고 동성은 별호’라고 되어 있다.

지리지(地理誌)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으나 우리 사천사람들은 사천을 ‘수양(洙陽)’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사천초등학교의 뒷산을 수양산이라고 하고, 수양산에 있는 누각을 수양루라 하며, 수양초등학교도 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사천군시절에는 수양문화제가 있었고 문화원지(文化院誌)의 제호(題號)도 수양이었다.

수양이라고 부른 시기가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자료미비로 찾을 수가 없으나 수양루를 지으면서 처음 부르지 않았나 여겨진다.

일제잔재로 지적받던 '산성공원'이 최근 '수양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사진제공: 사천시
수양루의 기록으로는, 『사천군지』(1990. 8. 30)에는 1919년 선인리 580-2번지에 세웠다고 되어 있고, 『사천읍지』(2010. 12. 30)의 기록을 찾아보면 원래 사천읍사무소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을 한일합방 전까지 구 군청 앞 노상에 있었으나 1919년 봄에 사천읍성 내인 수양산으로 이전하였다고 되어 있다.

수양루의 전신(前身)에 대하여『사천군지』에는 ‘이 누정의 전신은 본디 한일합방 전까지는 구 군청 앞 노상에 있었으며, 2층 누상에서 아침저녁으로 타종(打鐘)에 의해 성문의 개폐 신호 역할을 해 왔었다’고 되어 있는데 1699년에 간행한 『사천현여지승람』 누정조에는 객관의 문루는 ‘영화루(永和樓)’이고 ‘제경루(霽景樓)’는 객관의 동쪽에 있는 누각으로 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되어있어 수양루의 전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런 기록으로 보면 1919년 수양루를 건립하면서 「수양」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면 수양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사학에서 수(洙)자를 취하고 낙양(洛陽)에서 양(陽)자를 취하여 수양이라고 하였다고 본다.
인(仁)과 예(禮)를 근본 개념으로 하여, 수신(修身)에서 비롯하여 제가(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이르는 실천을 중심 과제로 한 학문인 유학(儒學)을 달리 이르는 말로 수사학(洙泗學)이라고 한다.

수사학이라는 학통은 공자(孔子)가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사이에서 제자들을 모아 가르친 데서 유래하여 수수의 수(洙)와 사수의 사(泗)를 취하여 수사학이라 한다.

중국의 낙양은 ‘낙수(洛水) 북쪽의 땅(陽)’이라는 뜻이며 북경, 남경, 서안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사대고도(四大古都) 중 한 곳이다.

오랜 세월동안 중국대륙은 낙양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낙양은 ‘천하의 중심(天下之中)’으로 여겨졌으며, 중국(中國)이라는 말도 낙양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낙양은 중화민족이 건설한 첫 번째 수도이자, 중화사상과 중화문화의 발원지이며, 가장 중국의 본질에 가까운 도시이기도 하다.

황하와 십 여 줄기의 지류로부터 부족함 없이 물을 조달할 수 있었던 낙양은 5000년 전부터 역사에 등장하였고, 4000년 전부터 성(城)을 쌓아왔으며, 1529년 동안 수도(首都)의 자리에 있었다. 하(夏)나라부터 시작하여 13개 왕조, 105명의 황제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으며 짐심(斟鄩), 시호(西毫), 낙읍(洛邑), 낙사(洛師), 성주(成周), 왕성(王城), 낙양(雒陽), 동도(東都), 동경(東京), 신도(神都), 낙경(洛京), 경낙(京洛), 낙도(洛都), 낙중(洛中), 숭경(嵩京), 중경(中京), 서경(西京)이라는 다양한 이름을 사용했다. 각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낙양은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땅이었다.

수양이라는 말은 공자의 학문인 수사학이 13왕조의 도읍지 낙양처럼 번성하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사천읍에는 유학(儒學)과 관련한 지명이 더러 남아 있다. 사천읍성의 동문, 곧 선인문이 있었으므로 동문 안 또는 동문동, 선인리라 하였고, 읍성의 서문 곧, 정의문(貞義門)이 있었으므로 서문 안 또는 서문동, 정의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화신동, 평례동, 상지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평례와 화신의 이름을 따서 평화리라 하였는데 남문안의 동네를 평례라 하여 유학의 근간인 인의예지신를 취하여 지은 이름이다.

니구산(尼丘山)은 정동면 수청리와 사남면 우천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니구라는 말은, 본래 선인 공자(孔子)가 태어난 산 이름으로 니산(尼山)이라고도 하는데 공자를 다르게 부르는 칭호를 말한다. 옛날 이 산 아래 성례동(聖禮洞)에는 선비들이 많이 살았는데 당시 유학(儒學;孔孟學 또는 洙泗學)이 풍미할 때 성인(聖人)을 흠모하는 나머지 이 산의 이름도 공자의 칭호를 따서 부쳐진 이름이다.

우리 사천에는 퇴계와 남명과 교유하던 구암 선생도 있지 않은가?

선인들이 수양이라는 이름을 붙인 연유를 분명히 알고 이름만 유학자가 아니고 향교와 구계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수사학이 낙양처럼 번성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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