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유적·소렌토 절벽·나폴리 항구를 돌아보며

내가 이 놀라운 여행을 하는 목적은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대상을 접촉하면서 본연의 나 자신을 깨닫기 위해서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탈리아 여행기 중에서)

이탈리아는 지중해에 있는 반도국가다. 우리나라도 반도 국가인 탓에 여러 가지 비교대상이 되지만 다분히 끼워 맞추기식의 논리인지라 수긍이 가는 이야기는 별로 없다. 한반도 전체 보다 크고(1.5배) 북쪽의 알프스 산맥과 인접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산지조차도 밭농사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구릉지역이 대부분이다. 기후적으로 온난하여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그런 탓에 많은 문명이 명멸하여 오늘의 이탈리아를 만들었다.

 탈리아는 곧 로마다.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된 전설적 왕조시대를 거쳐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8까지 천년의 제국이 남긴 유적과 유물은 현재의 이탈리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를테면 과거의 로마는 현재의 이탈리아가 유지될 수 있는 에너지원이다. 물론 현재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온전히 조상들의 유산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영광은 이 나라 사람들에게 언제나 따뜻하게 비치는 햇살과 같다.

로마는 정복국가였다. 따라서 당시 서양의 모든 문명을 통섭했다. 통섭은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국가, 다른 문화에 대한 조건 없는 통섭은 침략이며 약탈이다. 이러한 약탈은 로마를 유지시켰고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로마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통섭의 미명아래 이루어진 그 약탈의 현장에 일주일 동안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해 본다.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이탈리아는 1871년 로마를 수도로 정하고 통일을 완수하였는데 중심세력이 북쪽의 샤르데냐왕국이었으므로 남부의 여러 도시들은 지금도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에 비해 평균적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 중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지역을 둘러보았다.

 

▲ 캄파냐 평원

폼페이 앞에는 비옥한 캄파니아 평원이 있어 오래전부터 여러 종족들이 살아온 곳이다. BC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화산재에 덮이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1748년부터 조금씩 발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폼페이는 적어도 이 천 년 전에 건설되어 번영했던 도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인구 2만에서 5만 정도의 고대도시 폼페이는 비옥한 토지의 생산력과 바다에 인접한 항구의 기능을 함께 갖춘 도시로서 지리적으로 번영의 여러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폐허의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그들의 삶의 흔적을 보면서 한편으로 놀라고 또 한편으로 탐욕과 타락의 끝에 대해 생각해 본다.

▲ 델라본단차 거리 바닥돌

▲ 델라본단차 거리-인도와 차도가 분리된 거리

마리나 문을 거쳐 ‘델라본단차’ 거리를 걷다보면 여기가 이천년 전의 도시인지 의심이 든다. 정교한 바닥 돌의 배치와 차도 인도의 구분, 그리고 야간의 도로 표식을 위한 흰 돌의 배열까지 당시 문명의 정점에 있었던 그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 욕망의 집 루파나레
 

화산이라는 불가항력에 의해 도시가 파괴 되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폼페이의 몰락의 원인을 그들의 부패와 타락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살았던 공간에서 발견되는 여러 증거들이 후세 사람들에게 그러한 판단을 하게 한다. 예를 들면 ‘루파나레’(유곽, 즉 술집 이라는 뜻)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성적인 타락의 증거 들이 그러한 가설에 힘을 실어 주는데 인간 욕망의 무서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고 동시에 욕망의 제어는 전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지도 모른다.

▲ 각종 생활 편의 장치들. 위쪽 왼편부터 시내 곳곳에 설치된 음수대, 벽과 바닥에 매설된 토관(하수도), 빵집의 거대한 제분기, 마차를 묶어 둘 수 있는 도로 연석의 구멍, 상수도관으로 이용된 납 파이프

거대한 고대 도시의 곳곳에 남아있는 공동급수 시설이나 벽과 바닥에 암거된 상수 관과 배수관, 여러 가지 기발하고 발전된 생활편의장치들을 보면서 당시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본다. 오늘날의 시설과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발전한 그들의 기술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그 기술이 전승되거나 발전할 토대를 상실했다는 것은 문명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 문명의 단절이다. 이천년이 지난 뒤 먼 동양의 여행자가 그들의 폐허위에서 이런 생각을 떠 올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지만 문명의 정점에서 몰락한 문명의 단절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분명히 있어 보인다.

하지만 여행자의 눈에는 그들이 남긴 유적과 함께 빛나는 5월의 꽃들, 그리고 지중해의 푸른 하늘이 만들어낸 풍경만이 가득하다.

▲ 지중해 연안의 폼페이 풍경

오! 소렌토

▲ 멀리 바라 보이는 소렌토 풍경, 절벽위에 건설된 도시

폼페이로부터 버스로 30여분 절벽 위로 난 도로를 달렸다. 지나는 길 경사면에 어김없이 올리브 나무가 있고 알 수 없는 지중해의 야생화가 피어있다. 전망이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호텔이 들어서 있고 바다는 지중해의 색깔 그대로 푸르고 깊다. 소렌토로 가는 길이다. 안타깝게도 소렌토 시내로 갈 수 없어 멀리서 중세풍의 절벽도시 소렌토를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가 바로 유명한 칸초네 나폴레타나(나폴리 지역의 칸초네) 중의 하나인 “돌아와요 소렌토로”의 무대다. 그 노래 가사를 간단히 소개해 본다.

Torna A Surriento

보세요, 바다는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거기에는 많은 감상이 감돌고 있네요. 그것은 마치 당신의 부드러운 억양처럼 내게 꿈을 꾸게 해요. 나는 느낄 수 있어요. 정원에서 피어오르는 오렌지의 향기를. 사랑이 두근거리는 마음에 그 향기는 비할 데가 없지요. 당신은 말해요. <나는 떠납니다. 안녕히.>라고. 당신은 내 마음을 이 사랑의 땅에 남긴 채 멀어져 가는가요. 하지만 나에게서 달아나지 말아줘요.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줘요. 소렌토로 돌아와요.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고.

작사: 다비데 쿠르티스(D. Curtis) 작곡: 에르네스토 데 쿠르티스(E. De Curtis)

그 노래 가사처럼 나에게 소렌토는 신기루처럼 아른거렸고 단지 푸른 지중해의 물결만 넘실거렸다.

나폴리(산타 루치아)

▲ 나폴리 입구의 이름모를 아파트에 걸린 빨래를 보면 도시 빈민의 삶을 생각해보다.

나폴리로 들어서는 거리는 남루했다. 세계적 미항이라는 곳의 외곽은 지친 도시 빈민의 삶이 그대로 보였다. 곳곳에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건물에는 넝마처럼 걸린 빨래가 나부꼈고 사람들의 표정은 따가운 지중해의 햇살 탓인지 찡그리고 또 지쳐보였다. 삶의 생기를 잃은 빈민의 모습은 세계 공통인 모양이다. 여기서도 투어는 없고 단지 항구에 내려 멀리 베수비오 산과 지나온 소렌토 절벽만을 볼 뿐이다. 이곳에도 유명한 노래가 있다. 바로 “산타 루치아”다. 산타 루치아는 이곳의 거리 이름이며 또 이 도시의 수호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창공에 빛난 별, 물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아름다운 동산 행복의 나폴리 산천과 초목들 기다리누나.내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 루치아 산타 루치아 정든 나라에 행복아 길어라 산타 루치아 산타 루치아  

▲ 나폴리 항에서 바라다 본 베수비오 화산

아마도 내가 이 나폴리 항구의 밤바다에 도착했으면 이 노래 가사를 음미할 수 있었겠지만 햇볕 내리쬐는 한 낮, 나폴리 항구는 직장을 잃은 20대의 현지 남녀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그저 그런 해변일 뿐이었다.
 

<김 선생의 오솔길>은 현현적적 시민기자가 클래식 평론, 영화 평론, 책 평론 등으로 세상읽기를 하는 공간입니다. 현현적적은 곤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준식 교사의 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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