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재의 음악놀이터]'A Red Red Rose' '대니 보이'

학생들 고생시키며 내 준 과제는 주로 지하철 안에서 살핍니다.
 
버스와 달리 흔들림이 덜하고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집중할 수 있어 효율적이지요. '좀 잘 써라, 이놈들아!' '어 잘 썼는데.. 신통해라!' '애썼노라!'는 표시는 꼭 해 줍니다. 사실이니까요.

자주 던지는 과제는 나라, 시대가 서로 다른 노래 찾기입니다.

"중국 한나라 때 악부시 <상야(上邪), 하느님. 뭐 이런 정도겠지요.>와 고려가요 <정석가> 그리고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즈의 <A Red Red Rose> 비교해 공통점 찾아 비교해 제출해요."

오래전 악부시 <상야(上邪)>를 처음 읽고는 순수한 기원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주막에서]에서 찾은 <회상(回想)1>의 악센트에 몸을 굴리고 싶었던 것 만큼이나요.
<정석가>라고 다를 건 없지요. <A Red Red Rose>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학생들 글 살피다 보면 어디서 베꼈는지 영 껄끄러운 해석이 난무합니다. 좀 잘 된 번역 찾아서 옮기지.



로버트 번즈의 시 'A Red Red Rose'. 자료출처 : 유투브

보조가방에서 한 뭉치 꺼내 든 과제 들여다보노라면 이런저런 일이 생깁니다.
아직도 고운 기색이 남아있나? 작업 들어오는 경우, 시쳇말로 ‘살아있네!’

“아줌마, 설문조사해?”

“예에?”

난데없이 무슨 설문조사? 힐끗 쳐다보고 맙니다.

“근데 아줌마, 필체는 좋은 걸.”

사실은 제가 엄청난 악필이거든요.
우선 과제 점검이 급하니까 대꾸가 있을 리 있나요. 묵묵부답. 눈이, 손이 바쁩니다.
제가 나이 든 얼굴이니 젊은 사람들 눈에는 할아버지로 보일지도 모를 그 분, 자리 털고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충고 한 수 건네십니다.

“하긴 여자도 벌어야지.”

어쩌나. 근데 이것 별로 돈 안 되거든요.

털썩 옆자리 차지한 후 다짜고짜 툭 치는 아저씨.

“아줌마, 조선족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 해석 안 되는 경우입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껴안은 뭉텅이 겉장에 거의 <중국..> 뭐 이런 글씨가 있었던 거지요.

“히이...”

이 경우라고 대꾸할 말이 있을까요. 더 없지요.
그러면 한 번 더 툭 칩니다.

“아줌마, 고생스럽더라도 여기서 돈 많이 벌어.”

고맙기도 하시지.

작업이 무위로 돌아간 모양인지 멀찌감치 경로석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평생 써 온 서울말이지만 이런 경우 기서지방(경기, 서울 일원)말은 어쩌면 그리도 야멸차고 덕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지요. 게다가 이런 아저씨들은 더러 차내 방송으로 옆 사람에게 피해가 가니 다리 포개지 말라는 주의 따위는 안중에 없어요. 꼭 다리 꼬고 앉거든요.

이왕 갈 거면 외모는 한국사람 같다고, 또는 인물은 좋다고 한 마디 덧붙였으면 오죽 좋았을까요. 쩝. 인정머리 없기는.

근데 아저씨들, 왜 반말이세요? 여자면 그래도 돼요? 조선족이면 또 그래도 되냐구요오오?!

이 화풀이는 학생들에게 돌아갑니다.

“좀 잘 써요. 나보고 조선족 아줌마냐고 묻잖아요. 글이라도 좋으면 넘어가지만 속상해!”

와르르, 깔깔깔 시끄러워집니다.
이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오해가 걱정돼 군더더기지만 한 마디 덧붙입니다.

“조선족이 뭐 어떻다고 그 아저씨는 그리도 깔보는 표정인지 몰라, 참 내. 우리말 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는 55개 중국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중국인이란 말이에요. 안 그러겠지만 여러분은 우리나라에서 좀 험한 일 맡아서 하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관념 갖지 말아요.”

순한 녀석들 새롭게 정립한 ‘조선족’개념에

“아아...! 네에”


그럽니다. 이럴 때 참 이뻐요.


 
Andy M. Stewart 가 부른 'A Red Red Rose'. 자료출처 : 유투브

시대, 나라를 넘나들며 ‘사랑의 맹세’를 찾으라고 들들 볶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악에서 아일랜드의 상징이랄 수 있는 테너 존 맥 코맥의 뒤를 이었다고 일컬어지는 테너 로버트 화이트라는 미성의 사나이가 부른 노래 한 곡 때문이지요.

베토벤이 어렵게 살던 시절 영국,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민요를 정리한 작품집인데 그 가운데 로버트 번즈의 <A Red Red Rose>, 바로 이곡에 꽂힌 겁니다.

80, 90년대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 출신 또래들이 실내악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사무엘 샌더스가 피아노를 신나게 두드려 시작하는 <Helpless Womam>, ‘부모란 사람들이 돈에 눈멀어 부잣집 멍청이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들어요...’

어느 고을에나 있을 이야기, 돈에 팔려가게 생긴 가엾은 처녀, 예나 지금이나 이어지는 한심한 사연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음색으로 듣는 이에게 일러바칩니다. ‘굶주린 매가 달려드니 발발 떠는 비둘기가 화들짝 날아오르는군요’ 불쌍한 아가씨가 가엾어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나옵니다.

민요가 그렇잖아요. 이 노래도 로버트 번즈가 시로 정리한 거랍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불쌍한 처녀이야기 제쳐두고 우선 들을 노래가 랜섬 윌슨의 플루트로 시작되는 A (Red Red Rose (붉고 붉은 장미)>입니다.

이 가사는 낯익을 수밖에 없어요.
바다의 해저(seas gang)가 말라버리고, 햇빛에 바위가 녹아내릴 때까지...

마크 페스카노프라는 바이올린 주자는 이 음반 녹음할 즈음 서른 안팎이었을 텐데도 ‘세상사 다 이해하겠노라’는 너그러운 음색을 냅니다. 진심을 다한 맹세에서는 함께 힘을 보태지만요.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절하겠습니까, 나다니엘 로젠의 첼로가 받쳐줘요.
 
그리고 반주자들보다 적어도 스무 살은 더 먹은 로버트 화이트는 ‘천만리 길 떠나지만 내 돌아오리다. 사랑하는 그대여’를 휘파람 섞인 간절한 약속으로 끝을 맺어요. 실내악 반주가 길게 이어집니다.
그 내용이 뭡니까, 죽도록 사랑한다잖아요!

사랑의 맹세가 다 그렇지요.
하다못해 우리나라 국가도 그러지 않던가요? 그러니 각 시대, 각 나라의 시 비교를 과제로 던지지요. 더구나 숙제 낼 녀석들이 바로 ‘죽어도 좋을 사랑에 빠질 나이’ 아니던가요?


로버트 화이트가 부른 대니 보이. 자료출처 : 유투브 

6월이 시작됐군요. 붉고 붉은 장미가 사방에 넘쳐납니다. 그래서 ‘june bride'라고 했나 봐요.
로버트 화이트의 울림 좋고 설득력 있는 노래를 듣다보면 마음이 착해져요.

이 사나이가 부른 아일랜드 민요, 우리 귀에 익은 <대니 보이> 한 번 들어보세요.
가슴에 쌓였던 서운함이나 미움 등이 스르륵 녹아버린다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여자들이나 자기보다 나이 적은 사람에게 함부로 반말 해 제키는 김새는 아저씨들을 너그럽게 봐 주기는 싫은 걸요.

<임계재의 음악놀이터>는 음악으로 마음에 위로를 받았거나 감동했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공간이다. 글쓴이 임계재 선생은 중국문학을 전공한 작가이면서, 현재 숙명여대에서 중국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학창시절, 전공 공부보다는 음악듣기에 더 빠져 있었다는 게 글쓴이의 귀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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