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하면 생각나는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그륌머 앨범

힘겹게 다가온 봄과 다르게 여름은 어물쩍 기온을 높여 본색을 슬슬 드러내지요.
그리고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아침저녁 손발이 싸늘해지면 정신 번쩍 드는 가을이더군요.

어려서야 ‘가을 ’탄다‘고 나뭇잎, 하늘, 이슬 이러면서 뭔가 하나 남기려 신경 벼리고 날카롭게 굴지 않았습니까.

명절이야 어른들 몫이니 젊은이들은 그저 낭만이나 찾으면 된다며 천지가 좁다고 헤매고 돌아다니는 게 나이에 맞는 행동이기도 하겠지요.

어정쩡하게 대충 살아온 제게 명절은 ‘건달’같은 핑계가 때맞춰 주어져 그럭저럭 ‘개 머루 먹 듯’ 스치는 셈이었습니다. 남 따라 하면 곧잘 흉내는 내겠지만 사정이...

시인 노천명의 <추석>같은 향토적 기억도 거의 없는 제가 그나마 추석이면 챙겨드는 게 독일출신의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그륌머(1911- 1986)의 앨범입니다.

인물 잘 생긴데다 노래도 잘 하는 이런 사람을 보고 있자면 전에는 ‘아이고 배야!’하며 질투심 비슷한 게 뭉글뭉글 피어오르곤 했지만 나이 들어가면서는 이런 대단한 사람 노래 듣는 게 ‘웬 행운이냐’고 감사하는 마음이 드니 조금은 착해진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은 장르가 무엇이든 대를 이어 사람들의 오관을 건드리지요.
은사님 한 분이 특유의 목소리로 혼잣말 비슷하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임선생은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야.”
“네, 뭔가 안 풀리면 머릿속이 근지러워 못 살겠어요.”

사실 덧붙이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습니다.

“파우스트처럼 정말 많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작곡가들도 고전, 명작의 줄거리에 맞게 곡을 썼겠지요. 화가는 한 장면을 그리고요.

구노(Charles Gounod, 1818-1893)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었지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줄거리,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파우스트 박사의 지적인 허기를 그려낸 것 같거든요.

엘리자베트 그륌머(1911- 1986). 출처: 위키디피아
그런데 자신의 청춘을 묻은 공부가 허무해진 모양이지요. 이때 공식에 따라 악마가 등장하고요. 삶에 후회나 아쉬움이 왜 없겠습니까만 그냥 살지, 어쩌자고 순진한 여성은 집적거리는지, 에구. 뭐 그래야 이야기가 잘 먹혀들어가는 모양입니다.

물레질 하며 조신하게 살아가는 마르그레트를 훔쳐보고 작업하려는 남자 속셈도 모르는 채 옛날노래를 부르지요.

<툴레에 왕이 있었대요.(Es war ein konig in thule)>

그륌머의 이토록 고운 발성은 첫째로는 타고 나야 할 것이고, 그 다음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연습을 거쳐야할지 음악이론이라고는 도무지 모르는 제가 짐작이나 하겠습니까만 아무튼 처음 듣고 그야말로 ‘껌뻑’ 넘어갔습니다.

착한 아가씨의 전형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이 울림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찐득거리는 여름 지나 보송보송한 가을날 들었던 이 곡을 <추석빔>으로 정했지요

먹는 것, 입는 것, 대충 심드렁한 편인 제게 명절맞이로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꽤 오랜 세월, 다른 계절에는 잊고 지내다가도 추석이 가까워지면 손이 가는 음반입니다.

'정말 고운 음색이다' '어떻게 하면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늘 감탄합니다.

또 한 곡, 모차르트는 역시 모차르트입니다.
남자가 바람 들면 세상에 그보다 더 원통할 일이 있을까요
[피가로의 결혼], 정말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비교적 자주 들을 수 있는 오페라지요.
한 마디로 골치 아픈 인간이 백작입니다.

못된 데다 돈이나 권력까지 쥐고 있는 인간, 더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의 인물입니다.

이런 인간은 꼴에 눈은 있어가지고 ‘예쁜 여자’만 보이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펼칩니다.

이런 인물과 사는 아내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가슴속에 화로가 들어앉아있겠지요.

모차르트의 속내 감춘 로망이었을까, 바리톤의 능청맞은 알마비바 백작은 젊고 예쁜 아내의 하녀인 수잔나에게 엉큼한 마음을 먹고 집적댑니다. 며칠 있으면 죽고 못 사는 피가로와 결혼할 꿈꾸는 신부에게 말입니다.

백작부인은 ‘또 시작이야!’ 웬수같은 남편 버릇을 고쳐버리고 싶지요.

도대체 옛날 고리짝 못된 풍습은 어쩌자고 꺼내들어, 젊은이들 죽고 못 사는 사랑의 결론에 자기가 끼어든답니까. 망나니가 따로 없는 반푼이가 백작이지요. 욕 나옵니다.

그런 인간을 서방이라고 두고 봐야하는 백작부인, 빛 좋은 개살구가 따로 있나요?

백작부인의 아리아, <아름답던 시절은 가고>, 백작부인의 한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고약한 버릇 가진 남편도 옛날에는 ‘하늘의 별이 당신 눈에 있다.’고 열렬하게 환심 사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었는데 허구헌날 언짢은 꼴 보고 살아야하는 처지가 한심하겠지요. 그래서 한탄조로 부르는 아리아가 이 곡이잖아요.

근데 엘리자베트 그륌머는 속 타는 아내인 백작부인의 심정을 어쩌자고 그리 아름답게 표현하는지 거의 비현실적이에요. 이 곡도 껌뻑 넘어가게 좋답니다.

사람 사는 일, 특히 남편과 아내의 직간접 투쟁은 언제나 풍성한 이야기 거리의 원천 아닐까요. 크게 봐서는 남녀의 문제겠지만요.

품위 있게 잘 생긴 그륌머는 우리네 가까운, 나이 곱게 먹어가는 얼굴입니다. 노래 잘 하지, 인물 좋지, 뭘 더하겠습니까마는 그래서 ‘불공평하다.’는 질투가 솟았는데 글쎄, ‘옥에도 티’가 있더라고요. 치아가 안 이뻐요. 에이구, 아쉽다. ‘검은 머리’라는 뜻의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가 꼭 그렇거든요. 정말 미인인데 막판에 ‘한 가지’ 본인들로서는 정말 싫었을 부분이 우리에게는 마냥 부럽기만한 마음이 조금은 가셨으니, 세상에 이런 심통이 있을까마는 그거라도 있어야지, 그조차도 아니면 너무 하잖아요.(질투)

지금이라면 부모가 서둘러 치아교정을 했겠지요. 그러고 보면 세상 참 많이 좋아졌어요.

어찌된 게 지금은 미인형이라는 외모가 폭은 조붓하고 눈, 코 흠씬 크고 얼굴크기는 딱 조막만해야 된다며 건강에 큰 문제가 없는 데도 턱 깎아 내는 엄청난 짓을 겁 없이 하는 것 보면서 저런 사람들 늙으면 어쩌려고 저러나, 가치관이 너무도 다른 양상에 아연실색하는 중입니다. 멀쩡한 얼굴을 하루아침에 거북한 모습으로 만들어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배짱, 그건 무모함이 아닐는지요.

한 학생이 그러더군요. 여학교 동기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얼굴을 못 알아보다가 목소리 듣고서야 알았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그 친구가 양악수술인가를 했다는데 마치 ‘가면을 쓴 것 같더래요. 생각 같아서는 그 가면을 ’확‘ 벗겨버리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서글프더군요. 그 사람은 나름대로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만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냥 부모님이 주신 얼굴, 대충 그대로 살아가렵니다. 나이 먹어가니 아쉽기는 하지만 얼굴에 쌓인 주름이 거저는 아닐 테니까요.

고랑고랑한 몸이지만 그래도 명절 다가오니 ‘추석빔’은 한 판 들어야겠습니다.
그륌머가 토마의 미뇽에 나오는 곡,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나라를> 이렇게 물었지요. 조금 지나면 겨울이 올 것을 알아서일까요?

어쨌든 모두 잠시라도 풍성한 마음 지니셨으면 좋겠군요.


<임계재의 음악놀이터>는 음악으로 마음에 위로를 받았거나 감동했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공간이다. 글쓴이 임계재 선생은 중국문학을 전공한 작가이면서, 현재 숙명여대에서 중국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학창시절, 전공 공부보다는 음악듣기에 더 빠져 있었다는 게 글쓴이의 귀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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