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운명의 다른 얼굴

우연과 운명의 관계를 말하라면 아래와 같이 볼 수 있겠다.

Coincidences make destiny.
우연들이 모여 운명을 이룬다.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자는 두 가지 다른 오해를 하게 되는 데,

첫째는, 모든 결과는 나의 의지와는 별도로 운명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거나,

둘째로, 나의 의지 혹은 나의 이해는 항상 옳다고 믿는 것이다.


두번째 오해가 가끔은 더 위험하기도 한데, 왜냐하면 자신이 추측한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실제로는 우연히 생겨난 일들을 추측에 따라 다른 사람의 잘못, 혹은 악의로 오해하기도 하는 탓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처갓집에서 개를 한 마리 키우기 시작하면서 그 개를 점순이로 이름 짓고 점순아 점순아 하고 불렀다.

그것을 듣는 나로서는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점순이는 이모의 이름이었고, 나아가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인 점분을 간접적으로 부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추측했다. 우연히 개의 이름을 그 이름으로 정했고, 또 우연히 그 이름이 이모의 이름과 같은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그리고는, 이 사건이 여러가지 사소한 갈등에서와 같이 신경을 긁기위한 시도로 밖에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개 이름을 바꿔 불러달라고 말 할 기회만 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사건이 있으면 항상 중재자의 입장에 서는 아내는 이렇게 해명했다.

그 개를 데려올 당시 그 개가 점이 있었고 그래서 점박이로 불리웠는 데, 암컷인 그 개를 보다 다정히 부르기 위해서 점순이로 불렀다고 한다.

못 믿을 설명도 아니다.


이런 사건에서 우연 아니면 고의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나아가서 심각한 인간관계의 변화를 가져옴을 알 수 있다.

우연은 운명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우연처럼 운명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점에서 우리는 위의 두번째가 아닌 첫번째의 오해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세상사는 모두 인간의 손을 떠난 것, 인간은 그저 운명의 장난의 결과일 뿐이라는 생각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기본교리에서 가장 극명하게 그 갈등을 드러낸다.

인간은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나며, 동시에 신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모든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은 마치 좁은 길을 헤쳐나가던 나그네가 드디어 들판으로 나섰는데, 그것은 너무 넓고 길이라는 것도 없어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절대적인 섭리는 절대적인 자유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적인 신뢰로 절대적인 자유의 불안감을 극복하는 것.


그것은 마치 길을 걷는다기 보다는 춤을 추는 것과도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 그 사이에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땀어린 수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나,

동시에 그것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이 어쩔 수 없이 얻어지는 것이다.

그럼으로 자랑하여야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 삶의 가장 값진 깨닳음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운명은 원래 그대 편에 서 있었다. 당신이 깨닳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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