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맹지 사천시 문화관광해설사

조맹지 문화관광해설사.
사천시에는 세종대왕과 단종대왕의 태실지가 있습니다. 태실(胎室)이란, 말 그대로 ‘태를 보관하는 방’입니다. ‘태’는 모든 포유류에게 있는 것이지만, ‘머리카락도 부모님의 은혜’라 생각했던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 무엇보다 귀중한 ‘신체의 일부’ 그 이상이었습니다.

특히 왕실에서는 태봉이라 하여 왕족의 태를 봉안하는 ‘태 보호구역’을 조성하였습니다.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의 태는 길일을 택하여 깨끗이 백번 씻은 다음 작은 태항아리에 담고 다시 큰항아리에 담아 태실까지 봉송하는 절차와 봉안하는 의식을 했습니다.

조선 왕실이 명당을 찾아 태실을 조성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풍수학에서는 ‘남자가 만약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구경(九經)에 정통하며 무병장수하고 높은 관직에 오른다’고 하였습니다.

나라 안의 명당을 국유지로 만들어 태실을 조성함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싹을 자르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릉은 도읍지에서 1백리 안에 모신 반면 태실은 팔도의 명당에 조성함으로써 왕조의 은덕을 백성들이 두루 누리게 한다는 통치이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사천시 곤명면 지역은 풍수지리가 빼어나 지관들과 왕실에서 관심이 깊던 명당이었습니다. 지맥의 끝자락에 봉긋하게 돌출되어 솟아오른 봉우리의 형태는 삿갓을 놓은 형상입니다.

또한 구불구불 산을 내려오던 용이 힘차게 비상하다가 딱 멈추어 봉우리를 이룬 주산(主山)에서 뻗어 내린 쪽을 제외하고 나머지 삼면의 비탈면은 40~45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태봉 주위로는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의 역할을 하는 산줄기가 태봉을 감싸듯 둘러져 있어 전형적인 돌혈(突穴)에 해당합니다.

알봉의 모습인 단종태실지는 태실로서 명당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물이 있는데, 상분하합(上分下合)으로 물이 기(氣)의 흐름을 막아 태실지에 기가 충만해 있다고 합니다. 세종 즉위년(1418년) 조성된 세종대왕태실지는 1975년 경남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고, 단종대왕태실지는 조성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경남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천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에 따르면 태실지를 중수한 기록이 있는데 1597년 정유재란을 겪으며, 왜적에게 도굴되고 파괴된 태실지를 1601년(선조34년) 일부 수리하고 1730년, 1734년 두 차례에 대대적으로 중수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제강점기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전국의 명당에 산재해 있는 태실들이 모두 파헤쳐져 도굴되고 파괴된 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봉되었습니다. 그리고 원 태실 자리는 모두 민간인에게 팔아 사유화 시켰고 지금은 개인 묘지로 바뀌었습니다. 이렇듯 일제는 우리 민족이 가진 고유의 문화유산인 태실지를 유린했습니다.

경남에서 유일한 대왕의 태실지인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지는 사람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 훌륭한 인재로 거듭남을 믿는 우리민족 고유의 정신문화 유산입니다.
세종대왕의 태가 사천 곤명 땅에 묻힘으로써 그토록 훌륭한 임금으로 역사에 빛나고 계십니다. 한 가지 숙제가 있다면, 단종대왕의 태항아리가 사천을 떠나 서삼릉으로 이봉했다고 알려졌는데, 막상 서삼릉에는 단종대왕의 태실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인성대군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이 일을 추진한 일본의 관리들도 없고 이왕직이라는 왕실의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도 지금은 없습니다. 그 날의 일을 말해줄 증거를 찾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이에 대한 전후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단종대왕의 생물학적 태를 찾는 일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세에 짓밟힌 우리의 역사가 가슴 아프게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상처와 흉처를 조금이라도 보듬기 위해 ‘잃어버린 역사’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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