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bstbildnis als kranker) 1918

▲ (selbstbildnis als kranker) 1918
거친 표현과 강렬한 색에서 포비즘(야수파)의 느낌이 묻어나는가 하면 왜곡된 사물의 형태와 화면 곳곳에 배치되어진 검은 색은 에드바르드 뭉크의 영향도 있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화면 상단으로부터 중앙에 이르는 원색적인 노란색은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도 얼핏 느껴진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독일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Ernst ludwig kirchner 이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는 독일 바이에른 주(州)의 서북쪽 끝에 위치한 800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도시 아샤펜베르크에서 1880년에 태어났다. 1901년 드레스덴의 왕립공과대학에 입학해 건축학을 공부하면서 틈틈이 뮌헨의 미술학교에서 유겐트슈틸(Jugendstil) 운동(‘아르 누보’의 독일식 표현 즉, 신 예술 운동)의 중심인물인 헤르만 오브리스트(Hermann Obrist)에게 회화를 배웠다.

1905년 키르히너는 프리츠 브라이엘(Fritz Bleyl), 에리히 헤켈(Erich Heckel), 카를 슈미트 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 등 몇몇 친구들과 회화와 소묘 모임을 조직하고 이 모임의 이름을 ‘브뤼케(Die Brücke:다리)’라 부르면서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3년 모임의 구성원들과 의 불화로 다리파가 해체될 때까지 이들은 주로 반 문명, 반 근대화의 기치를 누드화로 표현하였다.

키르히너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1911년 브뤼케파의 일원으로서 유일하게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을 따라 독일 중부의 거대도시 베를린으로 이주하면서 도시문명이 주는 불안과 긴장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베를린 시절 이전의 누드화로 표현되었던 ‘자유’와 ‘제약 없는 삶’에서 이제는 대도시의 팽팽한 긴장이 주는 숨 막히는 긴장과 스트레스, 심지어 절망적인 느낌까지 키르히너의 자화상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림에서 보듯이 지나치게 종적인 이미지와 원색의 강렬한 채색, 그리고 과학적인 원근법이 거의 무시된 사물의 묘사는 도시문명이 가진 미친 듯한 속도감과 위기의식이 그림에 반영된 결과다. 뿐만 아니라 강렬한 원색의 사용에 따른 부조화는 키르히너가 도시문명 때문에 신경과민에 걸린 것처럼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느낌까지 있다.

1913년 키르히너와 다른 회원들 간의 갈등이 원인이 되어 브뤼케파는 해체되었다. 이듬해 키르히너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자신에게 일어난 복잡한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 도망치듯 군대에 자원입대했으나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고 오히려 신경쇠약의 진단을 받고 임시 제대해버린다.

1917년 전쟁을 피해 스위스 다보스 근처 프라우엔키르슈로 이주한 그는 이전의 신경쇠약으로 인한 약물중독에서 벗어나 다소간 건강을 회복하였으나 다보스의 엄혹한 겨울과 생의 반려자였던 에르나의 우울증이 그를 괴롭혔다.

1933년 독일의 나치가 집권하면서 젊은 시절 키르히너가 조직했던 브뤼케파의 누드화를 퇴폐적인 그림으로 규정하고 심지어 뮌헨에서 선전과 선동의 목적으로 ‘퇴폐 미술전’을 열었는데 여기에 키르히너가 포함되었고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키르히너 작품들을 독일 미술관에서 철거하거나 또는 폐기되어졌다.
 
이 일에 충격을 받은 키르히너는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고 마침내 58세가 되던 1938년, 이러한 일에 항의의 표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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