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신문 기사에서 재일교포 학자인 강상중 교수의 소설 <마음>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했다. 강상중 교수와 김연수 소설가와의 대담을 기록한 기사였다.

강상중 교수는 지금 세계의 가장 큰 문제를 ”공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면서, <마음>을 통해 “공감이 사라지는 사회와 시대에 사람들이 죽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죽은 이들로부터 무엇을 상속받고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했다(한겨레, 2014.08.19). 그 대목을 읽고서, 난 이 책이 ‘지금 이 시기’에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듯 소설 <마음>은 죽음이 일러주는 삶(산 자)의 자세,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길어 올려야 하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는 아들의 자살과 후쿠시마 대지진이라는 사건을 통과하고 그 무수한 죽음들을 겪으며, 반드시 죽음으로서만 읽을 수 있을 ‘산 자들의 책임’에 대해서 전하고자 한 듯했다.

저자 역시 말하듯 일본의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와 한국의 현재 상황은 너무도 닮아 있다. 후쿠시마 대지진의 충격 못지않게 우리에게 상흔을 남길 일은 세월호 사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과연 세월호에서 죽은 이들로부터 어떤 것을 ‘상속’받고, 그것을 어떻게 전하려 하고 있는가.

하지만 현실에서는 ‘세월호 피로감’이라는 말이 들려온다. 무엇 하나 해결된 것 없는 상황에서 너무도 당연한 요구와 분노를, 비록 타인의 고통이었다 할지라도, 그걸 어찌 '피로'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2차 가해이자 사회적 폭력이다. 또한 그게 정말 '타인의 고통'이었나? 아니었다. 지난 4월 16일 직후, 한국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한동안 자동차 경적 소리조차 낼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고통에 잠겨 있었다. 분명 나라 전체가 주말 나들이객조차 없을 정도의 ‘국상’ 분위기였다고 기억한다. 그것이 ‘우리’의 고통이었던 걸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분향소 앞에 줄을 서고, 스마트폰에 프로필 사진을 노란 리본으로 바꾸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똑같은 일을 ‘피로감’이라 표현하며, "그만 좀 하자"며 싸늘하게 등을 보이고 뒤돌아있는 사람들에게, ‘제발 뭐라고 말 좀 해봐!’라고 소리 치고 싶다.

진정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가야 하는 대상은 특정 정치세력이라기보다, 바로 그 '피로감'인지 모른다. 우리가 피로감이라는 폭력적 언어로 부르는 자기모순, '일상'과 '생활'이라는 이름의 자기배반 말이다.

우리가 죽은 이들로부터 전해 받고, 또한 전해야 할 그 ‘유산’을 애써 밀어내고 외면하고 있는, 바로 지금 그 행위 말이다. 세월호 피로감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부디 자신의 영혼에 예의를 지키길 바란다, 한 때 있었던….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