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Heinrich Louis Corinth의 붉은 예수(Der Rote Christus) 1922

사방으로 붉은 피가 낭자하다. 화면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은 기세의 핏방울은 태양 빛을 더 붉게 만들었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붉게 보이게 한다. 창이 가슴을 찌르고 그 상처에서 몸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핏방울의 주인공은 당연히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죽어가는 예수 뒤로 아들의 처절한 죽음을 보는 마리아의 절규가 보인다.

코린트(Franz Heinrich Louis Corinth)는 1858년 동프로이센 타피아우에서 출생했다. 지금은 타피아우라는 도시의 이름은 없어졌다. 왜냐하면 2차 대전 이후 이 도시는 구소련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도시 이름도 그바르데이스크(Gvardeysk - ‘수호 도시’라는 뜻)로 바뀌었다. 코린트는 1880년 뮌헨의 몇 몇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84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앵에서 공부한 후 뮌헨과 베를린을 오가며 예술적 지평을 넓히게 된다.

▲ Franz Heinrich Louis Corinth의 붉은 예수(Der Rote Christus) 1922
초기의 코린트는 P. 루벤스와 F. 할스 등 플랑드르 풍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적 회화에 관심을 가졌으나 후에 프랑스의 화가인 구스타브 쿠르베와 바르비종파의 외광파(外光派)회화로 전향하였고, 그는 이름을 루이스에서 로비스로 바꾼 후 1891년에 독일로 돌아와 뮌헨 분리파에 가입했다. 이 시점에서 코린트는 상징주의적인 요소들을 그림에 사용하면서 이전의 격식을 해체하는 그의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였고 그 뒤 독일인상파 회화의 대표자가 되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죽음은 많은 서양화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예술적 모티브였다. 회화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묘사하였지만 이 그림처럼 충격적이지는 않다. 사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사후에 로마병사가 가슴을 창으로 찔렀다는 것이 정설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처럼 유혈이 낭자한 장면은 있을 수 없다. 사후에는 피가 흐를 뿐 튀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충격적 장면은 오로지 코린트 개인의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코린트가 소속되었던 분리파란 사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단어는 아니다. 분리파의 분리는 ‘분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secedo’를 어원으로 하는데 아카데미즘이나 관 주도의 전시회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할 뿐 어떠한 예술적 의미도 없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에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목표로 하는 일군의 화가들이 예술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상호 교류를 추구하고 이전의 형식주의와 관료주의에서 벗어난 미술 작품의 제작이 목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함에 있어 이처럼 불경(?)한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때 분리파인 코린트의 의중을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유혈이 낭자한 보통의 인간으로 표현된 이 그림 Der Rote Christus(붉은 예수)는 20세기 초 세계대전의 참화를 목도한 코린트와 그가 속했던 분리파 예술가들, 그리고 그 시절 대중들의 솔직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즉 끔찍한 전장에서 피의 살육을 보았던 당시의 상황이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머리에 남아 이런 그림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1925년 발표된 Ecce Homo(보라 이 사람이로다! 요한복음 19절 5장)에서 그는 살아있는 예수를 그림으로서 몇 년 전 그렸던 참혹했던 기억으로부터 조금씩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그림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함에 있어 어떤 신성함이나 고결함도 없이 붉은 옷을 입은 불안한 모습의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역시 코린트가 가졌던 개인적 감상이라기보다는 20세기 초 세계 대전을 겪었던 당시의 사람들이 가졌던 마음의 모습이 그림으로 표현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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