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r Junge Routy bei Celeyran” 1882

▲ “Der Junge Routy bei Celeyran”1882
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Monfa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 화가는 프랑스 툴루즈 근처 알비에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 시절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다리 성장이 멈춰 평생을 난쟁이로 살아야 했다.

귀족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툴루즈 로트레크의 파리에서의 학비를 지원해주었고, 작업실도 얻어주었다. 키가 작아 금방 눈에 띄는 외모와 부유함 덕에 툴루즈 로트레크는 곧 몽마르트르에서 유명해졌다.

여자들을 좋아했지만 정상적인 여자와의 관계가 어려웠던 로트레크는 자연스럽게 매춘업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 덕에 하류계층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매춘부들을 비롯한 홍등가의 사람과 풍경을 그림의 소재로 삼아 여러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의 주인공도 그의 영지(툴루즈 근교)에서 일하는 젊은 일꾼을 모델로 삼아 그린 것으로서 로트레크의 시선이 닿아있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층이었는가가 어렴풋이 짐작된다. 일꾼의 복장으로 보아 오늘은 일을 하지 않거나 어쩌면 마을의 파티에 가기 위한 모습이다.

그러나 잔뜩 찌푸린 모습으로 미루어 뭔가 불만이 있는 모습이다. 로트레크의 일반적인 작품과는 달리 매우 옅은 색으로 표현된 이 그림은 마치 수채화를 보는 느낌이다.

젊은 로트레크는 폴 고갱과 프란시스코 고야, 그리고 에드가 드가로부터 색채의 사용법, 생기 넘치는 양식, 주제 선정문제 등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1889년부터는 앙데팡당전(독립화가전 - 이른바 기존의 화가데뷔 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방식의 전시회)에 출품하였고 최초의 개인전은 1893년에 파리에서 열었다. 그의 회화는 인상주의의 정점에서 앞으로의 회화(에곤 쉴레 등)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소묘는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소묘 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반적으로 로트레크의 유화는 짙고 강렬한 색조와 홍등가의 붉고 검은 색이 매우 잘 조화된 것으로서 이전의 화가들과는 비교되는 독자적인 것이었다.

본인의 신체적 불구가 가져다 준 삶의 고통과 회한을 그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우수로 바꾸어 우리를 공감하게 한다. 하지만 통제 없는 삶을 산 덕에 알코올중독과 매독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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