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사천-국립진주박물관 공동기획]사천, 그 3000년의 시간을 더듬다
①해안·내륙문화가 만난 곳‘곤명 본촌리’

▲ 1995년 발굴조사 당시의 본촌리 앞들. 사천만 해안문화와 덕천강 내륙문화가 만난 이곳에서 청동기문화가 꽃 피었다.(모든 사진제공=경상대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이 4월 16일부터 7월 9일까지 제12기 박물관대학을 운영한다. 주제는 ‘사천(泗川)’이다. 본촌리 유적과 이금동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사천 3000년의 역사를 아우른다. 뉴스사천은 박물관의 협조로 강의내용을 정리해 지면에 옮긴다.(편집자주)

(강사 : 경상대학교박물관 송영진 학예연구사) 사천시 곤명면 본촌리 유적지는 정부가 남강댐을 높이는 과정에 드러났다. 경상대박물관이 1992년 문화재지표조사를 통해 본촌마을 앞 들판에서 고려시대 석불상과 주춧돌, 기와편과 무문토기편을 발견했고, 이로써 고려시대 절터와 청동기시대 유적지임을 추정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95년 들어 시작했다. 조사는 경상대박물관이 맡았다. 조사결과 예상했던 대로 이곳이 폐사지임을 알리는 유물들이 출토됐다. 甲寅年造資福寺匠亡金棟梁善(갑인년조자복사장망김동량선)이라 쓰인 기와가 대표적이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이 폐사지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고고학자들이 본촌리 유적에 눈길을 준 것은 폐사지 근처에 청동기시대의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가로와 세로가 15.3m와 8.3m인 대형 집자리(127㎡, 38평)와 돌대문토기(일명 덧띠토기,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적색마연장경호(붉은색이며, 표면이 반들반들하고 목이 긴 항아리), 합인석부(조개 모양의 양날 돌도끼) 등이 그것이다. 비파형동검 암각화도 발견됐는데,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 역시 학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3000년 전으로 거슬러 가는 본촌리 역사
지금까지 알려진 남강유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대부분 남강 본류인 경호강을 끼고 있으나 본촌리 유적은 덕천강 유역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청동기시대에 있어서도 가장 빠른 시기다.

▲ 본촌리에서 출토된 석기들.
이를 보여주는 것이 대형 집자리인데, 송영진 학예연구사는 이와 관련해 “이른 시기에 초대형집이 건축되고 수백 년이 지난 뒤 오히려 소형집이 사용된 것은 건축학적 발달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그 속에는 한 지붕 아래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공동주거형태에서 부부중심의 소형집들이 군집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로 변화됐다고 하는 중요한 사회변화가 내재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이 집자리(나3호)에서 대형토기 3점을 비롯한 다양한 토기와 석기가 나왔다. 특징적인 유물은 사격자모양의 줄무늬토기이다. 줄무늬는 토기 몸통에 끈을 묶어 토기를 지지했던 흔적인데, 그 형태로 볼 때 자연상태의 넝쿨 끈이 아니라 가공된 상태의 끈이라는 게 학계의 생각이다. 본촌리 줄무늬토기는 당시 끈을 어떻게 묶었는지 그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준다.

한반도의 청동기시대가 기원전 2000년경에 시작됐고, 기원전 1500~1000년 사이를 청동기 전기로 본다는 점에 비춰 보면, 본촌리의 역사는 최소 3000년 전부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동검암각화의 비밀

▲ 국내 유일의 비파형동검 암각화.
본촌리 집자리 중 나10호에서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유물이 발견됐다. 비파형동검의 암각화다. 지금까지 실물의 비파형동검이 확인되지 않은 남강유역에서 암각화 형태로 발견됐다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여러 표현을 볼 때 석검암각화의 석검보다도 사실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암각화는 세 조각의 자연석에서 나타났다. 조사단은 초기 발굴 당시엔 암각화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나 2000년에 들어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다고 한다. 암각화는 쪼기 수법으로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암각화에서 표현한 동검은 비파형동검을 재가공한 것이다. 원형의 동검이 아닌 재가공한 동검이라는 점이 특징인데,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다. 동검은 실용성보다는 지배자의 권위를 뜻하는 상징성에 무게를 둔 물건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원형의 동검이 아닌, 부러지거나 망가진 동검을 재가공한 것을 그림으로 남겼을까? 학계에선 암각화를 새긴 사람이 전형의 동검을 몰랐거나, 아니면 그것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어쩌면 본촌리에선 비파형동검의 가치가 필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열어 놓았다. 참고할 점은, 재가공 동검은 여수와 순천, 창원 등 남해안을 중심으로 확인될 뿐 내륙이라 할 수 있는 남강유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동바다의 소통 길목 ‘본촌리’
이밖에 본촌리에선 입 안에 다른 사람의 치아를 품은 유골이 발견돼 그 시대의 발치의례를 확인했고, 주거지 폐기의례와 무덤에서의 파검의례 등 다양한 정신세계도 엿볼 수 있었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특히 본촌리는 사천해안지대와 덕천강 내륙지역을 잇는 소통길목에 위치해 두 지역의 가교 역할을 했음이 조사 결과 드러났다. 송영진 학예연구사는 내륙에선 곡물을, 해안에선 소금을 공급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는 사천만-남강의 이동 루트로 사천 검정-완사, 가화천-진주 평거, 축동-진주 유수 등을 제시했다.

▲ 본촌리에서 출토된 석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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