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진주박물관-뉴스사천 공동기획] 사천, 그 3000년의 시간을 더듬다
② 청동기시대 삶과 죽음 보여주는 ‘이금동고인돌’
국립진주박물관이 4월 16일부터 7월 9일까지 제12기 박물관대학을 운영한다. 주제는 ‘사천(泗川)’이다. 본촌리 유적과 이금동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사천 3000년의 역사를 아우른다. 뉴스사천은 박물관의 협조로 강의내용을 정리해 지면에 옮긴다.(편집자주) |
(강사 : 중부고고학연구소 윤호필 자문위원) 와룡산 남쪽 기슭, 궁지동 너른 들판과 그 너머 향촌 앞바다를 굽어보는 곳. 행정동으론 향촌동, 법정동으론 이금동에 속하는 금암마을 뒤 언덕에는 항공인력의 산실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옛 항공기능대학)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수만 년 전 구석기대에도 그곳엔 누군가 살았고,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이금동 땅은 앞 세대의 많은 기억을 저장하고 있었다. 그 기억을 일깨우는 계기가 바로 항공기능대학이었다.
이금동 일대는 예로부터 ‘바위들’이라 불릴 만큼 고인돌의 존재가 알려졌던 곳이다. 그러던 중 1995년 경남대학교박물관이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통해 이 일대 고인돌 분포양상을 대략 확인했다. 같은 해 항공기능대학 설립계획이 확정되고 이곳이 부지로 확정되면서 본격적인 시굴조사와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그 과정에 ‘바위들’의 숨은 역사가 드러났다.
조사는 (사)경남고고학연구소(현 재단법인삼강문화재연구원)이 맡았다. 조사 결과 자갈돌주먹도끼와 흑요석제박편 등 구석기시대 유물 10여 점이 출토돼 이곳이 구석기기대 문화층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후 세대 사람들로 인해 구석기의 흔적은 대부분 훼손됐고, 고인돌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 삶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만 해도 3000년의 시간은 족히 되고도 남음이다. 그 기억은 불과 땅속 10cm 아래 잠들어 있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그럼에도 고인돌의 가장 기본적 기능은 무덤이다. 고인돌의 기본구조는 상석-지석-묘역-매장주체부로 나눌 수 있다. 매장주체부란 시신을 보관하는 곳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위치에 따라 지상식 고인돌과 지하식 고인돌로 나뉜다. 그밖에 상석의 형태나 지석의 유무, 묘역의 설치 등에 따라 다양한 형식 분류가 이뤄진다.
이금동고인돌은 상석-묘역-매장주체부 구조다. 땅 위로는 지석(받침돌) 없이 상석(덮개돌)만 얹었다. 그러나 상석이 없는 무덤도 많은데, 대체로 후대에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장주체부는 석축석관, 상형석관, 목관, 토광으로 다양했다.
이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는 그곳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연관 지어 살필 수 있는데, 일부 청동기 전기의 유물이 발견된 고인돌도 있지만 BC6~4세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대체로 매장주체부에서 발견됐는데, 마제석검, 적색마연토기, 채문토기, 비파형동검, 관옥 등이 주를 이뤘다. 묘역에서는 무문토기편과 석기 파손편이 다량 출토됐다.
삶과 죽음의 공간을 한눈에
이금동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삶과 죽음의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수십 기의 고인돌이 무리를 지어 발견된 곳 그 북쪽 산기슭 방향에서 수많은 집자리가 확인됐는데, 이는 곧 마을과 아주 가까운 곳에 공동묘지를 두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건물터의 규모도 관심사다. 하나는 길이 29m에 폭이 7m로 정면 13칸, 측면 2칸 건물로 추정된다. 다른 하나는 규모가 더 커서 길이 32m, 폭 12m 정도다. 건물기둥 자리가 200개가 넘고 그 지름이 최대 1m에 이른다니 그 당시의 건축기술 또한 미뤄 짐작함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대략 3000년 전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와룡산 남쪽 이금동 일대에서 풍부한 산림자원과 수자원을 바탕으로 대규모 취락을 형성해 살았다. 돌을 잘 다뤘을 뿐 아니라 청동기문화도 꽃피웠다.
중부고고학연구소 윤호필 자문위원은 이금동유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집자리, 광장, 무덤군, 대형의 지상건물지 등 청동기시대 마을의 구조와 생활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