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龜巖)이정 선생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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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龜巖)이정 선생은 누구인가?
  • 뉴스사천
  • 승인 2015.05.0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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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은식 구암이정연구소장

▲ 구암 이정 선생 초상화.(사진=구암이정선연구소)
사천의 역사 속에 나오는 인물 중, 구암(龜巖) 이정(李楨) 선생을 빼 놓을 수 없다. 이름이 정(楨), 자는 강이(剛而), 호가 구암(龜巖)이다. 사천이씨 문중으로, 그는 1512년 지금의 사천읍 구암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호가 구암인 것도 마을 이름을 빌려왔기 때문이다. 12세에 하과(夏課)에 장원하고, 25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구암의 스승은 규암(圭巖) 송인수(宋麟壽) 선생이다. 그는 조정의 대간이었는데, 김안로의 폭정을 배척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어 왔는데, 구암이 찾아뵙고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구암의 나이는 24세였다. 그 후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는 조정에서 있으면서 우리나라에 유학에 관한 서적이 매우 적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젊은 시절부터 학문서적을 중국으로부터 구입하여 우리나라 유학의 토대를 쌓았다. 후일 퇴계 선생과 매우 친밀한 관계로 나아갔는데, 구암은 퇴계에게도 많은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하여 주었다. 퇴계의 학문에는 구암의 유학서적의 지원이 그 밑바탕에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구암이 조정에만 있지 아니하고 외직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30세가 되던 해에 영천군수를 시작으로, 선산군수, 청주목사, 경주부윤, 순천부사를 역임하였다. 특히, 경주부윤과 순천부사 시절의 역할은 특별하였다. 경주부윤 때에는 경주의 사적을 재건하였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는데, 3년간 왕릉을 보수하고 옛 건물을 수리하였다. 설총, 김유신, 태종무렬왕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후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를 복원하였는데, 당시 새마을 운동 중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경주출신 김수학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박대통령에게 경주를 복원해야 한다고 간곡히 건의하여 지금의 경주가 있었다고 했다.

김수학이라는 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종치기로 있으면서 독학하여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후일 새마을운동을 주도하였고, 내무부국장, 대구시장, 경북도지사, 토지개발공사사장, 국세청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평생의 소원이 구암선생을 모신 구계서원에서 초헌관으로 봉향을 해보는 것이라 하였다. 필자가 구암 학술세미나를 주관하고 구암을 현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자고 하여 서울로 찾아가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이팝나무 그늘아래서≫라는 자서전을 출간하였는데, 마지막 남은 한 권이라면서 나에게 주었다. 그는 이제 고인이 되셔서 구계서원에 봉향이 어렵게 되었다. 구암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다는 그분은 청빈의 삶이었다. 집에는 가재도구도 별로 없고, 청 테이프로 더덕더덕 붙인 낡은 소파가 덩그렇게 조그만 거실을 지키고 있었다.

구암이 순천부사시절에는, 사화로 순천에 유배된 사림의 명예회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영호남의 명예로운 이름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임청대를 복원하고 경현당을 세워 한훤당과 매계를 향사하고, 고봉 기대승에게 경현당의 기문을 쓰게 하였다. 옥천정사(玉川精舍)를 세우고, ≪성리유편(性理遺編)≫이라는 성리학서적을 출간하였다. 구암이 조정에서 맡은 벼슬로 학문과 연관된 쪽이 많다. 승정원 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등의 벼슬에서 볼 수 있다.

퇴계와의 교류는 평생 지속되었다. 두 사람의 편지는 70여통이나 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구암이 가끔 도산서원을 찾았지만, 퇴계도 끊임없이 사천을 찾아와서 시간을 보낸 모습이 두 사람의 글에 많이 나타난다. 구암은 10살 연장자인 퇴계를 깍듯이 스승으로 모셨고, 퇴계는 구암을 고제(高弟)라 하여 친구처럼 대하며 서로 그리워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구계서원에 제향을 지내면, 도산서원에서 퇴계의 문중이 내려와서 더불어 제향한다.

▲ 이은식 구암이정연구소장
나는 구암의 후손이 아니지만 고향 사천에 구암같은 훌륭한 분이 있음을 자랑한다. 그래서 구암을 현창하기 위해 학술대회와 구암제를 제안하였다. 10여 년 전 사천문화원에게 건의하여 학술대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매년 가을, 구암학술대회에 전국의 대학에서 참여를 하여 성황을 이루고 있다. 학술대회이고 보니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많지 않음은 어쩔 수 없으나 그래도 자리는 차고 넘친다. 그리고 구암의 장원급제를 기리고 사천인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구암제를 제안하였다. 과거시험을 재현하고 있는 구암제에 전국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매년 수백 명의 유림이 모여 한시를 꽃피운다.

인문학이 우리 속에 살아 있으면, 그 속에 삶의 한층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혜안이 나타나지 아닐까?

인문학은 늘 우리가 가치 있게 생각하고 추구하는 그런 모습의 결정체가 아닐까?

나는 비록 인문학의 바닥에서 헤매고 있지만, 가끔 구암의 모습에서 인문학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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