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진주박물관-뉴스사천 공동기획] 사천, 그 3000년의 시간을 더듬다

국립진주박물관이 4월 16일부터 7월 9일까지 제12기 박물관대학을 운영한다. 주제는 ‘사천(泗川)’이다. 본촌리 유적과 이금동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사천 3000년의 역사를 아우른다. 뉴스사천은 박물관의 협조로 강의내용을 정리해 지면에 옮긴다.(편집자주)


사천의 성곽은 주로 서쪽과 해안을 겨냥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910년대 선진리성 전경.
(강사 : 국립중앙박물관 조효식 학예연구사) 사람 사는 곳이 늘 평화롭지는 않다. 오히려 갈등과 긴장의 연속인 경우가 많으며, 이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갈등이 극에 이르면 전쟁으로 이어진다. 한반도에선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고, 6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600리가 넘는 휴전선 철책은 이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일러준다. 우리가 사는 사천은 그 휴전선 철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긴장감도 훨씬 덜한 편이다.

철책의 다른 이름은 어쩌면 성곽이다. 무기가 지금처럼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그 옛날엔 높이 쌓아올린 성곽이 더 나은 안전을 보장했고, 적과 대치하는 경계였다. 그런데 사천에 성곽의 흔적이 즐비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 얼마나 될까? 문화유적분포지도에 표기된 것만 18개에 조사되지 않은 것도 여럿이란다. 이쯤 되면 과거엔 이곳 사천이 휴전선 못지않은 최전방 기지였던 셈이다.

사천의 성곽은 언제, 누가, 왜 쌓았을까? 이 물음에 해답을 찾는 기회를 국립진주박물관이 마련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효식 학예연구사의 특강 ‘사천지역 성곽의 현황과 특징’을 따라가 보자.

가야·삼국시대에 쌓은 성곽
사천의 성곽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해안을 지키는 성곽이다. 축조 시기와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쉬운 점은 분석 가능한 성곽이 다수 밀집해 있음에도 이를 조사하고 종합 검토하려는 시도는 많지 않았음이다.

기존 문헌에 지표조사를 반영해 사천지역 성곽 정보가 정리된 것은 2003년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은 이를 바탕으로 사천시 문화유적분포지도를 발간했다. 지금까지 조사된 사천의 성곽 현황을 보면, 각산산성, 월성리성지, 니구산성, 두(음)벌산성, 성방리성지, 금성리토성, 성황당산성, 구월리성지, 신복리성지(안점봉수), 사천읍성, 선진리성(통양창성), 곤양읍성, 백천동 추정 삼천포진성지, 당병성, 구호리성지(장암창성지), 사등산성, 사천왜성(선진리성), 가산창성지 이상 18곳이다. 이는 문화유적분포지도 또는 성곽사전에 표기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과거 문헌에 언급된 내용이 되풀이되는 경우가 많고, 성곽의 유무 확인은 물론 그 내부시설이나 형태 전반이 불안정하다는 한계를 보인다. 다만 성곽의 축조 시기가 조선시대에서 삼국시대로 소급되는 경우가 많다는 게 하나의 흐름인데, 이에 관한 조효식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참조하자.

“사천의 성곽은 경주‧고령‧합천·함안의 것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가야시대에 축조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긴데, 실제로 몇몇 곳에서 가야시대 와편이 발견되기도 했다. 현재 서부경남의 성곽에 대한 시대 비정이 조선시대로 머무는 경향이 있는데, 정밀조사를 거치면 달라질 수 있다.”

사천지역 성곽의 방어체계
성곽이 있다는 건 그곳이 주요 이동통로였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사천의 성은 누가 누구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일까. 먼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사천의 북부권역에 있는 금성산토성, 금성산성, 성방산성은 백제를 겨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성황당산성과 니구산성, 도덕산성 등 남쪽의 여러 성들은 고성의 소가야 초입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소가야의 서쪽 방어성격이 강하다. 실제로 지금의 33번국도 주변으로 성곽이 밀집해 있고, 주로 산의 서쪽과 남쪽 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가 가야를 정벌한 뒤로는 역시 백제를 방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6세기 이후로 백제는 섬진강 이서지역을 시작으로 남해안 일원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또 백제 외에도 왜(일본)와 중국세력도 경계 대상이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로 넘어오면 사천지역 성곽 활용도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해안에 위치한 조창지인 통양창성지의 존재로 보건데 조창을 중심으로 한 주변 감시와 방어를 위한 성곽이 축조됐을 가능성이 크다. 성황당산성은 배후 거점으로 재활용 됐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새 읍성이 축조됐다. 사천읍성, 곤양읍성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 이전부터 있던 성곽도 조선시대 들어 대거 손질이 됐다. 해안성과 내륙 구릉 자락의 읍성, 배후 산성, 이 세 가지 형태의 성곽은 동시에 운영됐고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터지자 읍성이든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배후 산성에서 항전하는 양상이었다. 반대로 일본은 선진리에 일본식 왜성을 구축했다.

사천의 대표적 성곽 소개

▲성황당산성
정동면 예수리에 있다. 산 정상부를 성내로 삼고 9부 능선에 성벽을 두른 테뫼식 산성이다. 집수시설, 건물지 등이 남아 있다. 성내 출토유물과 축조 수법 등에서 삼국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는 산성이다. 경남기념물 제132호.

▲선진리성
용현면 선진리에 있으며, 통양창성으로도 불린다. 선진왜성의 외곽에 흙을 다져 만든 토성 형태로 흔적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됐으며, 축조 시기는 9세기 초반이다.

성방리 성지.
▲성방리성지
곤명면 성방리 소재. 사천과 진주, 하동으로 갈라지는 길목이다. 산 정상부와 동쪽 사면을 감싼 테뫼식 산성으로 석재를 이용했다. 성 내부에 타원형 집수시설이 확인되며, 삼국시대 토기편과 조선시대 기와편이 출토되는 것에서 폭 넓은 시기에 걸쳐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

▲각산산성
대방동 각산에 있다. 서남쪽 7~8부 능선에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둘레는 282m 정도. 성문이 동쪽과 남쪽 2곳에 있었다. 성곽의 형태나 축성법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으나 백제의 영토이던 605년에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 경남문화재자료 제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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