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길지 곤명이 세종·단종대왕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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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길지 곤명이 세종·단종대왕을 품다
  • 하병주 기자
  • 승인 2015.06.1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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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품은 사천 태실

▲ 곤명면 은사리 소곡산 자락에 남은 세종대왕태실지 석물들.

(강사 : 홍성익 강원대학교 교수)
 
예로부터 태(胎)는 신분의 귀천을 떠나 아주 신성하게 간주됐다. 태아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은 고마운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태를 처리하는 방식은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태우는 것(소태:燒胎)이다. 대문 밖이나 마당의 후미진 곳을 파고 왕겨 같은 것을 이용해 태웠다. 태를 집에서 멀리 떨어져 태우면 다음 아기가 늦고 가까우면 빨리 생긴다고 생각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아궁이에서 태우기도 했단다.

태를 땅에 묻는 풍습(매태:埋胎)도 널리 유행했다. 손이 없는 방위를 택해 묻되 일몰 후에 사람이 보지 않을 때를 택해 묻었다. 혹여 누군가 약용 목적으로 태를 캐 가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태를 그대로 묻기보다는 태운 후 재를 묻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드물게 태를 말려 보관하는 풍습(건태:乾胎)도 있었는데, 태를 말려 뒀다가 아이가 병이 나면 더운 물에 우려 약으로 먹이기도 했다.

물에 띄워 보내는 경우(수중기태:水中棄胎)도 있었는데, 강변이나 해변에 위치한 마을에서 나타나는 태 처리 방법이다. 물에 흘려보내거나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한국의 태실 문화
민간에 비해 왕실에서는 주로 태를 묻었다. 그 역사는 최소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북 진천에 김유신 장군의 태실이 현존하고 있다. 태실(胎室)이란 태를 묻은 장소를 일컬으며, 태봉, 태장봉으로도 불린다.
태실을 조성하는 문화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자리를 잡게 되는데, 왕손이 출생하면 태를 분청자 또는 백자 항아리에 넣어 미리 보아 둔 좋은 자리에 두었다가 3일 혹은 7일에 태를 백 번 씻는다. 이 절차가 끝나면 다시 태를 항아리에 넣는데 이때 엽전을 함께 넣는다. 항아리 입구를 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덮고 빨간 끈으로 봉한 뒤 다시 더 큰 항아리에 넣는데, 작은 항아리를 내호, 큰 항아리를 외호라 부른다. 내호와 외호 사이는 항아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솜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보관하던 태항아리는 태봉이 선정되면 묻게 되는데 이를 장태라 했다. 장태는 대체로 출생 후 5개월쯤 지나는 시기에 하게 된다. 이 작업은 안태사(安胎使)가 맡았다. 태를 묻기 위해 안태사 일행이 지나갈 때면 각 고을에선 지극한 예로써 맞아야 했기에 주민들이 느끼는 피로감이 컸다는 얘기도 전한다.

#수난 겪은 세종대왕태실지
27대에 걸친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세종과 단종의 태실지가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있다. 원래 왕자 신분에서 세자가 되거나 임금에 즉위하게 되면 그때마다 가봉(加封)이란 절차를 밟게 되는데, 이전의 태실에 비해 한층 위엄 있게 바뀐다. 때론 위치를 옮기기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세종 즉위 원년인 1418년에 지금의 곤명면 은사리 소곡산이 천하의 길지라 하여 안치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곡산은 지리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은 곳에 있다. 어태 안치를 기념해 당시 곤명현은 남해현과 묶여 곤남군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태실지는 이후 편치 못했다. 임진왜란 중 왜적에 의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었고, 이후 영조 시기에 보수공사가 이뤄지지만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 이안(1928~1930년)되는 수모를 다시 겪게 된다. 당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왕실 소유의 토지를 일제가 민간인에 불하하는 정책과 맞물렸는데, 일종의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의미가 담겼음이다. 이로 인해 태실지 본디 자리는 어느 민간인에게 넘어가 지금은 묘지가 들어서 있다. 태실지를 지키던 석물만 소곡산 북쪽 기슭에 덩그러니 남았다. 태실지는 1972년에 경상남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다.

#비운의 단종태실지
세종대왕태실지에 비하면 단종태실지는 더한 비운을 맞았다. 세종의 장손 단종이 그의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조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경북 성주에 조성돼 있던 단종의 태실을 훼철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조선 역사에서 한동안 사라졌던 단종태실에 관한 이야기는 영조 대에 이르러 갑자기 등장한다. 세종의 태실지를 보수하면서 단종의 태실지도 함께 보수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관한 기록은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1730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단종태실은 또 다시 사라졌다. 세종대왕태실과 같은 운명으로 1928년 서삼릉으로 이안되어 가지만 그 중간에 사라진 것이다. 단종의 태실에서 나온 태항아리에는 조선 8대 임금 예종의 큰아들 인성대군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

이를 두고 이날 강의를 맡은 홍성익 교수는 “역사상 태실이나 묘가 잘못 전해져오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며 “단종의 태실은 성주에 있었는데, 영조 대에 사천에서 등장한 것은 구전에만 의지해 일어난 해프닝”이란 견해를 밝혔다. 임진왜란 당시 왕실족보인 선원록이나 태봉 기록을 담고 있던 의궤들이 모두 불타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영조 대에 실수가 일어났단 얘기다.

하지만 조선왕실이 그리도 어리숙했을까? 의궤라면 조선시대 왕실의 공식 문서다. 이것을 부정한다는 게 썩 개운치 않다. 또 이왕직(=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산하 황실 업무 기구)의 주도로 이뤄진 태실 이안 작업이 성심성의껏 진행됐으리라 보기도 어렵다. 1928년 태실을 열었을 때의 보고서엔 분명히 단종태실이라 언급하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년에 걸쳐 54기의 태실이 발굴-이전-보관-안치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곤명면 은사리에 있는 단종태실지에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경상남도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태가 묻혔던 자리는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한 최연국의 묘가 차지하고 있다. 단종의 비운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 단종대왕태실지를 알리는 부러진 표지석.
▲ 세종대왕 백자태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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