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재발견-5. 죽음과 상실 넘어서기

통한의 눈물과 충격의 파도가 7일 동안 흘러가고 있고 그 속에서 우리는 매우 강렬한 집단적 '트라우마'(상처)를 경험하고 있다.

상처받은 영혼, 아니 상처 받을 수 있는 능동적 영혼으로서 우리는 그렇게 땅바닥을 치며 대한민국 500여만 명의 시민이 통곡하고 분노하는 상처의, 광기의 자발적 주체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우린 다시 조용한 일상으로 되돌아가, 상처 받은 수동적 영혼으로서 무기력하게 남아 있을 줄 모른다. 다시 자본주의 호명에 익숙해지려 상처와 두려움을 숨기고 간혹 술자리에서만 트져나오는 긴 한숨 뿐....

죽음,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 바깥에 놓임을, 즉 나 바깥과의 관계 하에 있음을 자각하는, 그래서 타자를 온전히 느끼고 소통하는 경험이다.

시청광장에 모인 추모시민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많은 사람들이 살아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노대통령의 죽음과 상실 뒤에서야 그 가치를 알았다면서 통곡했다.

소통하는 개인들은 소통이 만들어낸 감응으로 자신의 신체 바깥으로, 넘쳐나는 활력과 잠재성, 가능성의 세계를 가로지르며, 개인이라는 주체성의 외부로 자신들을 몰아낸다. 그래서 '무리전체'가, 연대가 형성된다.

맑스는 인간을 정의하면서 "자신의 무리전체를 자신의 사고 대상으로 두는 유(類)적존재"라 했던가? 우린 스스로가 이렇게 감응, 소통, 연대로서 집단의 무리가 된다.

이것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푸코의 '억압가설'을 증명하는 것일까? 억압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의 개념적 논리를 넘어 우리는 살아 숨쉬는 열정적, 창발적 생명체이다. 결여의 존재가 아닌, 충만의 존재이며 이미 창안되고 수용된 가치들과 가정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존재, 자기보존을 넘어 항상 과잉을 생산하는 측정불가능의 존재이다

자본주의 역사의 동력은 인간의 이러한 과잉과 생성을 상품화, 공리화시켜 지배하고 유지시키지 않았던가?

그럼 측정불가능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봉하마을의 백만송이 국화.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하나의 현실이 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다른 현실을 꿈꾸는 자의 사상은 광기일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큰수의 법칙만을 따르는, 지침과 규정을 현실적 요구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들에겐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대성통곡하는 자들은 분명 광인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 광인임을 선언하는 것. 자본주의 체제 합리성을 내면화하지 않는 것, 자기가치화와 연대를 통해 코뮨적 개인으로서, 기꺼이 지배적 가치의 창조적 파괴자임을 선언하고 대안적 가치와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정체성이란 없다. "무엇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접속들의 한 효과이기"(What it is is an effect of its connections) 때문이다. 천개의 가치와 접속하고, 산봉우리도 아닌, 개울가도 아닌, 중간의 고원에 머무르기 시작할 때 우린 광인임을 멈추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길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음도 알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