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승면 사천경찰서장.
1077년 1월 차가운 겨울날,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머물고 있던 카노사에 부인과 함께 찾아가 눈발이 흩날리는 성문 앞에서 맨발로 무릎을 꿇은 채 자신에 대한 교황의 파문을 철회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렇게 밥을 굶고 추위에 떨며 사흘을 기다린 후에야 교황으로부터 용서를 받는다.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무릎을 꿇는 것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 하는 것이라면 수모가 아니다. 신에게 기도하며 무릎을 꿇거나 조상이나 어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기꺼이 상대에 대해 경배 또는 존숭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상대의 용서를 애걸하거나 적장에게 항복하는 자리에서의 무릎 꿇기는 자신의 명예와 자존감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그야말로 참기 힘든 수모일 뿐이다.

근자에 어느 항공사 부사장이 기내 땅콩 서비스를 트집 잡아 비행기 사무장과 스튜어디스의 무릎을 꿇게 한 일이 있었고, 그 얼마 후에는 백화점 주차장에서 손님이 주차 아르바이트생의 태도를 문제 삼아 아르바이트생의 무릎을 꿇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은행이나 백화점에서는 이른바 ‘VIP고객’의 트집에 종업원이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일이 다반사라는데, 이런 무릎 꿇리기가 직접 고객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은행, 백화점 책임자가 고객관리 차원에서 종업원이 수모를 감내하도록 떠넘긴다는 점에서 ‘무릎 꿇기’가 주는 수치심은 비행기 사무장이나 주차 아르바이트생 ‘무릎 꿇리기’ 경우와 별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제임스 길리건은 『위험한 정치인』이라는 책에서 수치심과 폭력 문제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수치심은 폭력을 낳는 필요조건이라서, 수치심이 항상 폭력을 낳지는 않지만 폭력이 발생할 때는 수치심과 굴욕스런 경험, 또는 이런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반드시 작용한다고 한다. 살인범들의 범행 사유도 대부분이 “병신 취급당했다”는 것, 다시 말해 자존감을 잃을 정도의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무릎 꿇기만 수모인 것은 아니다. 도연명은 고작 다섯 말의 봉급 때문에 시골의 소인배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며 벼슬을 던지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합당하지 못한 사유라면 무릎이나 허리를 굽히는 게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마음에 없는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도 수모로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약자라고 하여 돈과 권세 앞에서 쉽게 무릎 꿇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에 앞서 강자가 함부로 약자의 무릎을 꿇리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 상대가 수치심을 참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자신의 우월한 지위에 스스로 뿌듯해할지 모르지만 상대가 늘 참기만 하리라는 보장이 없고, 또 그가 늘 약자의 지위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사에는 부침이 있기 때문이다. 카노사의 굴욕 3년 후 하인리히 4세는 로마로 쳐들어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켰다. 그렇게 쫓겨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자신이 받은 수모를 씻지 못한 채 몇 년 후 망명지에서 죽고 만다.

수치심 안겨주는 사회는 폭력과 보복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수 있고, 그 피해가 자신을 향해 되돌아올 수도 있다. 자신을 낮추는 겸양과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첩경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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