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그 3000년의 시간을 더듬다’ 연재를 마치며>

‘사천 인류’ 3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
‘늑도박물관’으로 역사 한눈에 볼 수 있길


▲ 연륙교 공사 당시 수만 점 출토된 유물들은 늑도가 2000여년 전 국제무역항으로 이름 떨쳤음을 보여준다.
국립진주박물관이 ‘사천(泗川)’을 주제로 특별전을 열면서 4월 16일부터 7월 23일까지 제12기 박물관대학을 함께 운영했다. 처음엔 7월 9일까지 전체 13강을 계획했으나 뜻밖의 ‘메르스’ 사태로 12강으로 줄어드는 등 차질을 빚었다. <뉴스사천>은 진주박물관의 도움으로 현장 답사를 제외한 모든 강의 내용을 기사화 했다. 사천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접근이 부족했던 본지로서는 우리의 것을 알고 또 알리는 좋은 기회였다. 이제 ‘사천, 그 3000년의 시간을 더듬다’ 연재를 마치며 못 다한 이야기와 더불어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먼저 사천의 역사를 시간 순으로 다시 한 번 짚어보자. 이곳 사천은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얕은 바다와 여러 하천을 끼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유적도 주로 해안평야지대에서 나오는데, 이금동유적이 대표적이다. 지금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가 있는 곳으로, 몸돌과 격지, 흑요석 박편 등이 나왔다. 1~3만 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구평리(서포)와 늑도, 선진리 유적이 있다. 알려진 유적은 적지만 신석기 조기부터 만기까지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정동면 소곡리‧용현면 덕곡리‧이금동을 비롯해 40여 곳에 이른다. 특히 이금동 유적은 열상(列狀)으로 이어진 묘역식 고인돌과 주거지의 군집형태에서 볼 때 3개의 집단으로 이뤄졌으며, 대형 건물 2동은 특수한 목적을 갖고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위해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본촌리(곤명) 유적에서는 각목돌대문토기와 이중구연토기를 지표로 하는 전기부터 송국리문화 단계까지의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다. 주거지에서는 중앙수혈에 완형 토기 1점과 동검암각화가 고의로 폐기된 채로 발굴됐는데, 아주 이례적인 경우여서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초기철기시대를 알 수 있는 유적은 방지리(사남) 유적과 늑도 유적을 꼽을 수 있다. 이 유적들에서는 각종 생활용구를 비롯해 낙랑계 토기, 중국 동전, 야요이계 토기 등이 출토돼 고대 한‧중‧일 교류관계에 있어 매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상에 나타난 사천의 처음 이름은 3세기 초 포상팔국 중 하나인 사물국(史勿國)이다. 봉계리(곤명), 예수리(정동), 월성리(사남), 송지리(용현) 유적에서 삼국시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선진리성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축조된 토성임이 확인됐다. 선진리 신라비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무주신자(武周新字,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가 제정하여 집권 당시만 일정기간 사용했던 글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고려시대 사찰은 대부분 폐허가 되어 남아 있지 않으나 본촌리 사지가 남아 있어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 알 수 있다. 보물 제614호로 지정된 흥사리 매향비에는 고려 말 어지러운 나라 상황과 극복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세종과 단종의 태실지가 있는 곤명면 은사리가 대표적이다. 태실수개의궤가 전하고 있다. 인물로는 퇴계 이황, 남명 조식과 교유가 두터웠던 구암 이정 선생이 있고, 구암리에 구계서원이 전하고 있다. 근대엔 다솔사와 그 주지였던 효당 스님, 그리고 효당 스님의 ‘차’가 세인의 눈길을 끌었다.

▲ 학계가 주목하는 선진리 신라비.
돌아보면, 사천엔 국가지정문화재가 극히 드물다. 경남도지정문화재도 많은 편이 아니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것 같은데 문화재는 왜 빈약할까? 국보급 문화재만 몇 있어도 관광객 유치가 수월할 텐데 말이다.

혹시 철기시대의 등장이 이런 결과를 낳은 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철기문화는 생활상의 변화에만 영향이 미친 것이 아니라 농업 생산력의 증대,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연맹체로 통합‧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고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이곳 사천은 늘 변방 또는 경계에 해당했고, 고려와 조선 시기에도 왜구의 노략질이 잦았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평화와 안정 속에 세련된 문화를 꽃 피우기는 어려웠으리라. 그러니 청동기시대까지는 의미 있는 유적이 여럿 발견되지만 삼국시대 이후엔 유적과 유물이 드문 것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물론 추정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청동기에서 초기철기에 이르는 시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늑도는 고대 유물의 보고란 점이다. 삼천포대교의 일부 공사 구간에서만 2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서역의 유물까지 나와, 그 옛날 늑도는 국제해상교류의 근거지였을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섬 전체가 거대한 문화재”란 얘기도 과하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늑도에 접근하는 총체적 마스터플랜이 아직 없다. 박물관도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해당 유물을 여러 연구기관에 흩어두고 있는 실정이다. 멀지 않은 시간에 늑도 유물을 한 자리에 모으고, 수만 년 사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이밖에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야 할 문화재가 더 있다. 흥사리 매향비와 향촌 매향암각화, 선진리 신라비는 하나 같이 매향 문화의 흔적이다. 매향의 흔적이 이렇게 밀집한 곳은 전국에 또 없다. 그 시대 정서를 이해하려 노력하다보면 오늘날 좋은 문화콘텐츠로 연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단종태실지의 진위 논란에 적극 대응할 필요도 있다. 성주군에서 단종태실지 원형이 있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 단종 즉위 이전의 원손 신분일 때 만들어진 태실지다. 하지만 우리에겐 왕실에서 만든 태실수개의궤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태실을 서삼릉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단종의 흔적이 사라졌다고 해서 엄연한 왕실 기록을 무시할 순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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