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바닷가에 가면 ‘파도’란 말을 쉽게 찾을 수가 있다. 물론 바다 파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삼천포에 가면 ‘파도 식당’이 있고. 사천읍내에도 ‘파도’가 있다. 내가 마지막 교직생활을 한 남해 노량에도 ‘파도 횟집’이 있었다. 난 그런 종류의 파도와 인연이 하나 있다. 내가 처음 교직에 몸을 담은 1980년, T시에도 ‘파도’가 있었다. ‘파도 생맥주’가게였다. 내가 열고 ‘파도’라고 작명도 한 이 업소에 대해 말하자면 약간의 사연이 있다.

처음 들어간 하숙집에 수산전문대 늦깎이 신입생이 한 명 있었다. 포항 출신으로 참 착한 청년이었는데 어느 날 자취하러 나간다고 했다. 동거하는 처녀가 있었던 것이다. 사고무친한 그 청년은 꼭 자신 같은 처지의 처녀를 만나 식도 올리지 않고 살림을 꾸린 것이다. 이런 지경이니 학업을 계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청년을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신문광고가 있었다. ‘공무원 부업 자금 대출!’이라는 국민은행 광고였던 것이다. 박봉에 시달리는 공무원의 환심을 사고 싶었던지(당시 공무원은 박봉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은 공무원들에게 부업을 권했다.

요즈음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장 은행에 달려가 대출을 받았고 통기타 젊은이들이 찾는 생맥주 집‘파도’를 개업했다. 자본은 내가 조달하고 가게를 꾸려나가는 것은 그 젊은 부부가 맡았다. 경영이 어려워도 인건비는 최우선으로 지급했다. 아이까지 태어난 그 젊은 부부의 생명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졸업을 눈앞에 둔 어느 날, 가게 앞 드럼통을 잘라 만든 노천난로에 장작불을 피워 놓고 마주 앉았다. 당시 세계적 호황으로 인력이 딸려서 전문대를 졸업하고 항해사 자격만 따면 앞 다투어 외항선에서 데려갔다.

“언제 배를 타냐?”
“그렇잖아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내년에 탈까 합니다. 일 년 더 장사하면서 외상 다 받아 선생님 부채를 정리해 드리고 가겠습니다.”
“외상 장부 다 가져와 봐라.”

두툼한 대학노트 3권이었다. 여기에 담긴 외상값을 다 받으면 그동안 내가 낸 빚은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책갈피를 뒤적이는 시늉을 하다가 그 노트들을 장작불 위에 모두 던졌다.

“이제 떠나라. 앞길이 창창한데 외상값 때문에 인생을 낭비할 수 없잖나!”

얼마 전부터 무시로 가슴이 아프고 물을 마셔도 걸리고 해서 내시경 검사를 해 보았더니 식도가 헐어 궤양이 되었단다. 물끄러미 컴퓨터로 내 식도 영상을 바라보는데 문득 그 포항 청년이 생각났다. 졸업을 앞두고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식도가 헐어 고생했던 것이다. 이제는 쉰을 훌쩍 넘었을 녀석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멋진 선장이 되어있을까?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