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8 아시아를 품다] 2편 인도네시아에 발을 내딛다

※ ‘1318 아시아를 품다’는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가 외교부의 지원으로 진행하는 공공외교 프로젝트이며, <뉴스사천>은 그 진행과정을 동행취재 해 6회에 걸쳐 싣는다.

▲ 청소년 공공외교관들은 어린이들과 친해지며 어색함을 털어내는 방법을 쉽게 익혔다.
8월 10일 밤 11시. ‘외쳐라 코리아’ 팀원 12명을 태운 비행기가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공항을 빠져나오니 텁텁한 공기가 ‘훅’ 하고 온몸을 자극했다. 마치 삼투압이 작용하는 것처럼 더운 공기가 차가운 피부를 뚫고 폐 깊숙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인도네시아는 건기라더니 공기가 왜 이래?’ 여행을 앞두고 인도네시아 사정을 조금 주워듣긴 했는데 처음부터 예상이 빗나갔다. 우리네 여름보다는 덜 습해서 숨 쉬기가 나을 줄 알았더니 차이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공항 앞에서 먼저 도착한 조은희 소장을 만났다. 조은희 소장은 간(間)문화교육연구소를 이끌면서 다문화 이해에 관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마침 말레이시아에 머물던 중이라 공공외교관 팀과 며칠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일행은 미리 준비해둔 25인승 버스를 타고 인드라마유로 향했다. 최소 4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팀을 이끄는 이정기 센터장이 인도네시아에서 보낼 6일간 일정에 관해 팀원들에게 다시 한 번 소개했다.

사실 이번 ‘1318 아시아를 품다’라는 공공외교관 프로젝트는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가 ‘세계로여행학교’란 이름으로 수년째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영상편지를 고향집에 전달하고, 다시 고향 가족의 영상편지를 국내에 가져와 전달하는 게 골격이다. 이 일을 처음엔 어른들이 맡았으나 몇 해 전부터 교육적 효과를 고려해 배달부를 청소년들로 바꾼 터였다.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 사이에 사랑의 배달부 역할을 하는 일도 공공외교 활동으로 손색이 없겠지만 ‘외쳐라 코리아’ 팀은 야심찬 계획을 하나 더 세웠다. 현지 고등학교를 방문해 그곳 학생들을 대상으로 문화박람회를 여는 것이다. 이를 통해 청소년들은 인도네시아 청소년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세계 속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거였다.

#1

▲ (위에서 부터) ▲밝게 웃는 수완다 씨 아버지 ▲서양혜 학생과 아기 ▲수완다 씨 가족
버스로 밤새 달린 일행은 새벽 5시 가까운 시간에야 첫 방문지에 도착했다. 남반구에 위치한 탓인지 주위는 아직 깜깜했다. ‘이 시간에 도착해 어쩌잔 얘기지?’ 이런 생각이 왜 안 들겠는가. 그러나 이정기 센터장 왈, “안 자고 기다리고 있을 걸요?”

말 그대로였다. 버스에서 내리는 우리 일행을 누군가 맞은 건 물론이려니와 5분쯤 걸어 도착한 집에선 가족들이 함께 맞았다. 그곳은 한국에서 수년째 일하고 있는 수완다 씨의 집이었고, 그의 부모님이 일행을 따뜻이 맞았다. 날이 밝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체로 같은 마을에 사는 수완다 씨 친지들이었다.

우리 일행과 그들은 서먹함을 지우려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어쩌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걸. 오래 전 한국에서 몇 년 일한 적 있다는 수완다 씨 삼촌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소통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 어색한 분위기가 한순간 사라졌다. 무슨 말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웃고 떠들고 왁자지껄 뒤섞였다. 애들이었다. 양혜와 가은이를 시작으로 우리 일행이 그들의 아이들에게 말을 걸면서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어른들의 경계심 또는 어색함이 풀렸나보다. 무뚝뚝한 지민, 태영, 길현 마저 나서니 온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골목골목엔 우리 아이들과 8살 전후 현지 어린이들의 고함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버스에 오른 양혜가 말했다. “이제 알았어요. 저분들과 친해지려면 먼저 애들부터 사랑스러워 하면 되겠어요. 이분들, 너무 착하고 순박한 것 같아요.”

#2
수완다 씨 집에서 걸어 10분 정도 거리에는 피어리 씨 집이 있었다. 처음엔 예정에 없었으나 출국 전 피어리 씨 요청에 따라 급히 추가된 방문지다. 센터장은 “이 집도 지난해 방문했던 집인데, 수완다 집과 가까워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연한 얘기다. 가야할 길이 멀고 시간이 빠듯하다 해도 가족에게 안부 전하고픈 그 마음을 어찌 모른 체 하겠는가.

피어리 씨 집은 학교 근처에 있었는데, 우리가 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학생들이 먼저 쪼르르 모여들었다.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무리에 둘러싸인 일행은 뭔가 해야 했다. “얘들아, 준비한 것 꺼내라!” 이정기 센터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솔비가 움직였다.

인도네시아 아이들을 사로잡을 비장의 무기는 바로 풍선! 기특한 우리 청소년 공공외교관들은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매직 풍선 만드는 법을 익히고 장비까지 준비해온 것이었다. 피어리 씨 집 앞은 한동안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른 아침 골목길을 누볐던 우리 청소년들도 이상야릇한 감흥에 더 달아올랐다. 시계는 오전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피어리 씨 가족들이 영상편지를 만들고 있다.
피어리 씨의 안부를 전하고 다시 그 가족들의 영상을 카메라에 담고 나니 다시 식사시간이 찾아 왔다. ‘엥, 이게 뭔 말인가?’ 알고 보니 피어리 씨 가족은 한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해두고 아직 아침식사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푸짐한 음식이 좁은 방안에 가득 찼다. 우리 일행이 두 번째 아침식사를 먹는 동안 그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우리가 같이 먹자고 시늉을 하긴 해도 앉을 자리가 없음을 모르지 않았으니, 그저 빨리 그릇을 비우고 일어날 수밖에. 일행은 다시 한 번 그들의 마음씀씀이에 감복하며 집을 떠났다.

#3
다음 예정지는 차로 2시간 남짓 떨어진 찌르본이었다. 이곳에서 만날 사람은 수립또 씨다. 그는 나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한때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면서 그의 동료들처럼 금의환향을 꿈꿨지만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찍 떠났다. 어쩌면 “적응하지 못했다”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시간을 2013년 6월로 돌리면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에 있는 수립또 씨를 만날 수 있다. 그는 당시 직장 동료로부터 폭력과 폭언, 위협에 못 이겨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며 이정기 센터장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나는 그 과정을 취재했다.

그가 일했던 곳은 바닷가에 있는 수산업 회사. 어릴 때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했던 그로선 바다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 무섭고 싫었다. 이를 잘 알지 못했던 업체 관계자들은 그를 탓했고, 험하게 대했던 모양이다. 그는 참을 수 없었고, 고향에 돌아가겠노라 말했다. 하지만 업체에선 직장을 옮기기 위해 꾀를 부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더 다그쳤다.

▲ 수립또 씨 가족
이정기 센터장은 당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가려는 수립또 씨를 도왔다. 밀린 임금을 받게 했고, 여비라도 만들기 위해 십시일반 후원금을 모았다. 일각에선 근심 어린 시선도 있었다. 그가 인도네시아로 가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남아 다른 직장을 찾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였다. 그때 이 센터장은 말했다. “눈빛을 보면 압니다. 절대 남지 않아요. 분명히 돌아갑니다.”

그는 정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말레이시아에서 새 일터를 구해 1년6개월을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 채 안 되는 상황이었다. 2년 만에 다시 그를 만났다. 평생 다시 만나리라곤 생각지 못한 그가 그의 아내, 딸과 함께 우리를 맞았다. 뜨거운 음식을 내놨다. 기분이 묘했다.

“그때 안 좋은 기억은 다 잊었어요. 지금은 고마운 분과 고마운 마음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수립또 씨의 밝은 웃음을 뒤로 하는데,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불현 듯 스쳤다. 인도네시아 여정 첫날이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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