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햐, 그 젊은 선생이 참 찐득찐득 해요!”
“어허, 그 정도로 그래요? 참 독특한 친구군. 교장이 힘들겠는데!”
섬마을 중학교 교무실에서 교감과 교무주임이 나누는 대화이다. 충무시내 중학교에 근무하는 문제 교사에 대한 내용이다. 듣자하니 교육연합회 가입을 거부하며 교장과 다투고 있단다. 교육연합회는 교사들은 임용과 동시에 자동가입 되는 이른바 어용단체이다. 문제의 K선생은 역사 교사이다. ‘반역사적이고 어용단체인 교육연합회에 역사교사로서 가입할 수 없다’며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역시 문제 교사였던 나를 찾았고 우리는 곧 의기투합했다. 그를 통해 민주화 운동을 알았고 참여하고 있는 교사들이 있다는 것 역시 알았다. 그렇게 해서 교육운동 1세대에 턱걸이로 참여할 수 있었다. 비록 나이는 서너 살 아래이지만 K는 교육운동에 있어서 나의 길잡이였고 스승인 셈이었다. 그와 난 크고 작은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했다. 당시 민주교사협의회를 조직한 젊은 교사들을 막기 위해 정부당국은 교육 관료들을 동원하곤 했다. 교사들은 상대적으로 젊었고 교육 관료들은 나이가 들었다. 관료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나오기에 대부분의 경우 큰 충돌 없이 해산하곤 했는데 극성을 부리며 충성을 다 하는 교육 관료가 꼭 있기 마련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날도 그랬다. 제법 성깔 꽤나 있어 보이는 장학사 한 명이 심한 소리를 하며 시비를 걸었다. 그 때 K가 다짜고짜 달려 나가 멱살을 잡아 패대기치며 벼락같이 큰 소리를 냅다 질렀다.
“ 야 이놈아, 넌 아래위도 없냐? 집안에 형도 없느냐고!”
K 선생의 형용은 이랬다. 듬직한 곰 같은 체격에 도수 높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는 반 쯤 대머리에 옷차림은 유행과는 거리가 통 멀었다.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우산대로 장학사를 마구 갈기는 데 영락없이 나이 지긋한 집안 어른이 버릇없는 개망난이를 때려잡는 모습이었다. 혼비백산한 장학사는 걸음아 내 살리라고 도망쳤다. 30대 후반의 노총각 K는 겉모습만으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워 때로는 50대 후반으로 까지도 보였기에 이렇게 집회 현장에서는 매우 유용했다. 더욱이 힘이 장사였으니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엊그제 K로부터 전화가 왔다.
“ 형님,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술 한 잔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전화했소.”
재판에 이겼단다. 민주화 운동에 처음 참여한 대학 재학 시절에 조작사건에 말려 억울하게 1년 남짓 옥살이를 하였는데 재심 청구가 받아 들여져 재판을 했고 기어코 무죄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전화를 받으면서 옛일이 주마등 같이 지나가는데 문득 우스꽝스러운 그 장면이 생각나서 혼자 껄껄 웃었다. K는 지금은 나이 든 시늉을 할 필요가 없이 원로 교사가 되었지만 역사 전쟁의 일선에서 여전히 ‘찐득하게’ 활약하고 있다. 올 겨울에는 사천만 생선회 맛보자며 불현듯이 나타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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