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8 아시아를 품다] 아, 캄보디아!

▲ 소니-홍릿 부부의 고향집을 찾아가는 도중 호수를 건너는 모습.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17일 새벽에 나선 청소년 공공외교관 일행은 말레이시아를 경유한 뒤 저녁이 되어서야 캄보디아 프놈펜에 도착했다. 북반구로 올라온 탓인지 공기가 인도네시아의 것과 다름을 금방 깨달았다. 공기가 습하니 더위는 더 심하게 느껴졌다.

끈적거리는 살갗을 그대로 지닌 채 이날 밤, 일행은 준마카라 씨 가족들에게 첫 영상편지를 전달했다. 그의 집은 프놈펜 외곽에 있었고, 부모님은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캄보디아의 대중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청소년들은 “음식이 입에 맞다”며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캄보디아의 평범한 가정집 체험도 준마카라 씨 집에서 하게 된 셈이었다. 더구나 준마카라 씨 침실까지 이용하려니 서로 뒤바뀐 삶인 냥 기분이 묘했다.

둘째 방문지인 찬트라 씨 집은 준마카라 씨 집에서 차로 20여 분 떨어져 있을 만큼 가까웠다. 부모님과 할머니, 그의 누이와 형제 등 가족들이 아침식사도 거른 채 이방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손자의 모습이 화면에 어른거리는 동안 할머니는 내내 눈물을 닦았다.

오후엔 소니와 홍릿 부부의 고향집을 찾았다. 그들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혼이다. 그럼에도 소니 씨는 사천에서 농업연수생으로, 남편인 홍릿 씨는 부산의 한 제조업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메콩강의 범람원에 해당하는 황토빛깔 호수를 배로 건너는데, 이정기 센터장이 말했다.
“지난해엔 많은 비로 도로가 끊겨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이번엔 그나마 배가 있어 다행이네요.”

소니와 홍릿 씨의 고향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영상편지 상영은 홍릿 씨 부모님 집에서, 그리고 일행들 식사는 소니 씨 부모님 집에서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사돈 관계로 조금은 불편할 듯도 하건만 ‘이웃이 먼저’라는 듯 격의 없는 모습이 보기에도 좋았다. 마을사람들은 하나 같이 정이 넘쳐서, 우리네 옛 고향 정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음날엔 대장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실라이 씨 집과 잔느렛 씨 집을 거쳐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씨엠립까지 5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야 했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로 생각하면 별 것 아닐 수 있으나 캄보디아의 도로 형편을 고려하면 대장정이라 이를만했다.

▲ 청소년들과 비슷한 또래의 노동자들이 봉제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

임실라이 씨 고향집 동네에선 청소년들이 작은 충격에 빠졌다. 한적한 이 시골마을엔 대형 창고처럼 생긴 봉제 공장이 있었는데,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 중 다수가 자기들 또래임을 알고 난 뒤다. 또 하루 10시간에 이르는 노동시간에도 한 달 급여는 200달러, 우리 돈으로 20만 원 정도에 그친다는 얘길 듣고는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임실라이 씨 가족에게 영상편지 전달 임무를 맡은 길현이 말했다.

“세상이 참 불공평한 것 같아요. 우리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이렇게 여행도 다니는데, 여기 제 또래들은 일을 하고 있네요. 그냥 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현의 생각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도 이심전심 비슷한 심경을 내비쳤다. 이들의 마음이 그들에게도 전해지길 바랐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60~70년대, 저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네 그 세대에게도 이들의 마음이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이것이야 말로 지역을 넘고 세대를 뛰어 넘는 소통이겠다. 여행이 주는 선물이겠다.

캄보디아 일정의 후반은 역사문화탐방에 가까웠다. 앙코르와트가 고대 역사문화를 보여준다면 근대는 뚜올슬랭박물관이다.
뚜올슬랭박물관은 킬링필드로 알려진 1970년대 캄보디아 학살 현장 중 하나다. 이 박물관은 원래 고등학교로 쓰였으나 1975년부터 4년간 폴포트의 비밀요원들이 감옥으로 사용했다. 이 기간 동안 이곳에서 2만여 명이 온갖 고문을 당하며 죽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 숙연한 모습으로 뚜올슬랭박물관을 둘러보는 청소년들.

청소년 공공외교관들이 해질녘 이곳을 찾았다. 박물관 곳곳에 묻어 있는 만행의 흔적, 학살의 흔적을 확인하며 일행은 말을 잃었다. 이는 “절대 웃지 말라”는 경고 글귀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이와 유사한 만행과 학살의 기억이 우리에게도 오래지 않은 시절에 있었노라 설명하니 아이들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사실 보도연맹사건처럼 한국전쟁을 전후해 일어난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6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왜 학살을 저질렀는지 모른다. 정부는 학살지를 발굴할 계획도, 발굴한 유골을 보관할 계획도 마땅히 세우지 않고 있다. 킬링필드 현장을 박물관으로 남기고 수천 구의 유골을 보관한 캄보디아만도 못한 역사 인식 수준이다.

일행은 소니 씨와 함께 농업연수생으로 일하는 쿤넷 씨 집을 방문해 마지막 영상편지를 전달했다. 그리고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이삭학교를 방문했다. 학교장 김기대 씨는 경상대학교 졸업생으로, 2003년에 캄보디아에 들어와 그곳 청년들이 농촌을 지키고 살 수 있도록 적정기술을 가르치는 삶을 살고 있다. 김 씨와 나눈 짧은 대화에도 아이들은 큰 감동을 받았는지 눈빛이 밝았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사는 삶의 즐거움을 피력한 그의 마지막 말이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여러 분들이 지금 꾸고 있는 꿈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 너머의 꿈을 꼭 찾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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