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먼 향기를 연꽃에서 느껴 본다

사천과 진주의 시 경계지에 강주연못이 있다. 사천IC에서 진주로 접어들면 자동차매매센터를 지나 첫 마을이, ‘보신탕’으로 유명한 예하리다. 이곳이 진주시 정촌면 예하리 강주마을이다.

   
   

500살은 족히 넘은 왕버드나무에 세월의 흔적으로 옹이자리가 깊이 패였다. 뚫려버린 옹이 저너머 '강주연못'의 전설을 만난다.

강주(康州)는 통일신라 신문왕 때 만든 지방행정체제인 9주5소경의 하나였다. 강주가 오늘에 까지 남아, 마을 지명이 됐다. 2004년 강주연못은 생태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공원으로서도 빼어나지만 유서 깊은 역사 유적지이기도 하다.

고려 공민왕 재위시, 강주지역(서부경남) 해안마을은 왜적의 수탈이 극심했다. 이들을 퇴치하기 위한 부대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그 사령부 격인 본진이 이곳 강주연못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

진주와 통합되어 사라진 진양군에서 '고려조강주진영유지'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칼을 형상화 해서 강주진영 숙영지를 표현했다.

지금은 농지로 정리되어 옛적의 강나루 흔적이 없어졌지만 두량 상류에서 시작된 중선천은 지금도 중선포(中宣浦)라는 나루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의 조세 공물의 집창(集倉)으로서 개경 조운선의 정박지인 장암포가 중선포에서 물길로, 2km 남짓 떨어져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다.

수령이 600년이 넘은 이팝나무 군락이 지금도 남아서 강주연못의 나이를 말해 준다.

역사의 기록은 없지만, 고려말 최영장군과 이순장군이 병마사로서 왜적 퇴치전을 펼칠때, 이곳 강주에서 숙영하며 작전을 펼쳤으리라. 이곳 강주 진영 병사들로 하여금 진주의 토성을 오늘의 석성으로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대단한 병력이 주둔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건물은 생물이 아니라서 쉬 파괴된다. 100년전의 일호정은 오간데 없고 그자리에 최근에 건축한듯한 강연정 누각이 세워져 쉼터를 대신한다.

위성사진으로 강주연못을 보면 보름달처럼 둥근 못이다.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비정(比定)하기에 따라, 통일신라시대 혹은 그 이전에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밭고랑 같은데서 빗살무늬토기의 파편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니 말이다.

나무로 조성한 연못 탐방로, 연못 속의 생태를 보다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한 편의 시설이다.

강주연못에 서서 남쪽을 바라본다. 사천 읍성에서 갈대숲 사이로 난 외길을 따라 가다 보면 십수교가 나오고 그 다리는 열 물이 지나면 잠겼단다. 십수교를 지나 처음 만나는 곳이 이곳 강주였겠다. 일제강점기에 비행장 활주로를 만들면서 대규모 간척과 토목공사가 있었다. 이때 구암천과 중선천이 만들었던 넓다란 길호강도 물길이 바뀐 것 같다. 지금은 4차선 도로가 잘 닦여 진주로 향하지만 불과 100년이 조금 더 된 시간부터 바뀐 이 땅의 변화다.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이 제법 붐빈다. 더 넓은 연못에 해마다 피는 연꽃이 지금부터 개화가 시작되기에 꽃구경 온 사람들이다.

조선말기에 지었다는 일호정(一湖亭)은 없어지고 그 근처에 연호정(蓮湖亭)이 세워져 탐방객이 잔잔한 연못을 바라보며 비를 피하고 있다. 비가 내리니 황소개구리 울음소리도 같이 세차진다.

연못 산책길은 마사토를 깔아 촉감 좋게 발밑에서 바스라진다. 물가에는 꽃이 진 창포가 빵빵한 씨주머니를 머리에 이고 있다. 배고픈 청살모가 쓰레기 틈에서 먹이를 뒤지다가 나무 위로 황급히 도망간다.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도읍으로의 물류운반도 해상중심에서 육로 중심으로 바뀌었다. 왜구의 노략질과 수탈을 피해 내륙으로 백성들의 거처를 옮긴 것 같다. 이 무렵부터 진주가 서부경남의 중심이 되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

강주연못에는 홍연 뿐만아니라 백연등이 지금부터 꽃이 피기 시작한다.

긴 역사를 두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강주연못, 언제까지 이곳을 지켰으면 좋으련만 강주연못 옆으로 잘 닦인 신작로는 무슨 일로 가는지 모를 차량행렬이 빠르게 지나간다.

가족들과 함께 들러도 좋겠다. 잘 깔아 둔 마사토를 밟다보면 언제 한바퀴를 돌아 한번 더 돌고 싶어지는 곳이 강주연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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