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잃은 도장 100여 개, 편하게 일하려다 생긴 민주주의 상처”

경남 사천의 한 마을이장이 주민들에게 돌려주고 남은 도장들이다. 이들은 왜 임자없는 신세일까?
70가구 안팎 규모인 경남 사천의 어느 시골마을, 마을이장님이 보관하고 있는 도장꾸러미입니다. 참 많기도 하지요?

대충 헤아려도 150개는 족히 됩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주인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는군요.

지금의 이장이 이전 이장으로부터 물려받은 도장은 200개 정도였지만 그 중 상당수를 주인을 찾아 돌려줬다고 하니, 남은 것은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요?

잠깐 이 수수께끼를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이 마을의 정확한 가구 수가 궁금한데, 70 안팎이라 했으니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마을이장님도 딱 꼬집어 ‘몇 가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서류상 등록된 세대수와 실제로 살고 있는 세대수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농촌을 등지고 도시 삶을 즐기면서도, 무슨 연유에선지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분명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처럼 보여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일 겁니다.

도시민이 가짜 농민이 되려는 이유는?

농촌이 많이 어렵다보니, 국가나 자치단체가 정책적으로 농민과 농업을 지원해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대표 격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쌀 소득보전 직불금’이 아닌가 싶네요. 이는 지난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으로, 이 문제로 보건복지부차관이 옷을 벗었지요. 그리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공직자들이 이 문제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시골마을은 마을이장이 주민들의 도장을 대부분 보관하고 있다. 일의 편리를 도모하는 뜻이지만 자칫 말썽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쌀직불금 사태가 깨우친 것이 있다면, 실제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가짜 ‘농민’의 지위를 가지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고, 그 지위를 이용해 각종 탈법행위를 일으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진짜 농민들은 다시 한 번 억장이 무너져야 했습니다.

기자가 이 마을 이장을 만나는 순간에도 30년 이상 공직에 몸담았다는 분이 찾아와, 자신이 실제로 농사를 짓고 있음을 확인해 달라고 떼를 쓰다 뜻을 못 이루고 돌아갔습니다.

마을이장이 그 사람의 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도장을 ‘꾹’ 한 번 찍어 주면 그 사람은 분명 서류상으론 ‘농민’이 되었을 테지요.

그렇다고 이 마을에 가짜 농민이 절반 넘게 차지한다고 볼 순 없습니다. 사실 남은 도장의 대부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도시로 떠난 사람들의 도장이랍니다.

크고 작은 마을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주민들 동의가 없으면 나중에라도 말썽을 일으키곤 하지요. 그래서 마을이장은 이 형식을 잘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매번 집집마다 돌며 도장 받기가 힘드니까 전체 마을주민들의 도장을 이장이 보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수 십 년 쌓인 도장이 아마 저 도장들일 겁니다. 도장이 전/현직 마을이장들에게 대물림 되는 사이에 어떤 이는 세상을 떠났고, 다른 어떤 이는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흔적만 저렇게 도장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마을이장은 이 도장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있습니다. 다소 힘이 들더라도 도장 받을 일이 생기면 일일이 찾아가 설명하고 직접 확인을 받겠답니다.

그가 그렇게 결정한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모르는 채 이장의 독단으로 일이 결정되고, 그 일에 마을사람들도 이미 동의한 것으로 인정되어, 마을 전체가 홍역을 치루는 일이 몇 차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마을이장은 다소 귀찮더라도 주민들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수 십 년 내려온 관습을 깼다.
그는 말합니다. “나도 쉽게 일하고 싶지요. 하지만 그건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귀찮고 힘이 들더라도 마을사람들의 의견을 제대로 물어 결정해야 되니까요. 도장꾸러미를 계속 가지고 있으면 나도 마음 변할지 몰라서 돌려주는 겁니다.”

국회의원들도 국민들의 도장을 돌려주길

대한민국 국회가 22일 미디어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홍역을 치렀습니다. 또 그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디어법 내용에 관한 논쟁은 남겨두고서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번 결정이 ‘국회의원 다수’라는 참 쉬운 방법으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분명 더 많은 국민들이 미디어법 개정을 반대하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그래서 이번 참에 국회의원들도 “선거과정에서 받았던 국민들의 도장을 돌려주어라”라고 권하고 싶네요. 마을주민들의 도장을 돌려주는 이 마을이장님처럼 말입니다.

‘생활 자치’ ‘생활 민주주의’로 ‘대한민국 정치’ ‘국회 민주주의’에 한 수 가르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마을은 도장을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에서부터 생활자치를 이루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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