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잃은 도장 100여 개, 편하게 일하려다 생긴 민주주의 상처”
대충 헤아려도 150개는 족히 됩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주인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는군요.
지금의 이장이 이전 이장으로부터 물려받은 도장은 200개 정도였지만 그 중 상당수를 주인을 찾아 돌려줬다고 하니, 남은 것은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요?
잠깐 이 수수께끼를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이 마을의 정확한 가구 수가 궁금한데, 70 안팎이라 했으니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마을이장님도 딱 꼬집어 ‘몇 가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서류상 등록된 세대수와 실제로 살고 있는 세대수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농촌을 등지고 도시 삶을 즐기면서도, 무슨 연유에선지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분명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처럼 보여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일 겁니다.
도시민이 가짜 농민이 되려는 이유는?
농촌이 많이 어렵다보니, 국가나 자치단체가 정책적으로 농민과 농업을 지원해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대표 격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쌀 소득보전 직불금’이 아닌가 싶네요. 이는 지난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으로, 이 문제로 보건복지부차관이 옷을 벗었지요. 그리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공직자들이 이 문제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기자가 이 마을 이장을 만나는 순간에도 30년 이상 공직에 몸담았다는 분이 찾아와, 자신이 실제로 농사를 짓고 있음을 확인해 달라고 떼를 쓰다 뜻을 못 이루고 돌아갔습니다.
마을이장이 그 사람의 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도장을 ‘꾹’ 한 번 찍어 주면 그 사람은 분명 서류상으론 ‘농민’이 되었을 테지요.
그렇다고 이 마을에 가짜 농민이 절반 넘게 차지한다고 볼 순 없습니다. 사실 남은 도장의 대부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도시로 떠난 사람들의 도장이랍니다.
크고 작은 마을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주민들 동의가 없으면 나중에라도 말썽을 일으키곤 하지요. 그래서 마을이장은 이 형식을 잘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매번 집집마다 돌며 도장 받기가 힘드니까 전체 마을주민들의 도장을 이장이 보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수 십 년 쌓인 도장이 아마 저 도장들일 겁니다. 도장이 전/현직 마을이장들에게 대물림 되는 사이에 어떤 이는 세상을 떠났고, 다른 어떤 이는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흔적만 저렇게 도장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마을이장은 이 도장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있습니다. 다소 힘이 들더라도 도장 받을 일이 생기면 일일이 찾아가 설명하고 직접 확인을 받겠답니다.
그가 그렇게 결정한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모르는 채 이장의 독단으로 일이 결정되고, 그 일에 마을사람들도 이미 동의한 것으로 인정되어, 마을 전체가 홍역을 치루는 일이 몇 차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들도 국민들의 도장을 돌려주길
대한민국 국회가 22일 미디어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홍역을 치렀습니다. 또 그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디어법 내용에 관한 논쟁은 남겨두고서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번 결정이 ‘국회의원 다수’라는 참 쉬운 방법으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분명 더 많은 국민들이 미디어법 개정을 반대하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그래서 이번 참에 국회의원들도 “선거과정에서 받았던 국민들의 도장을 돌려주어라”라고 권하고 싶네요. 마을주민들의 도장을 돌려주는 이 마을이장님처럼 말입니다.
‘생활 자치’ ‘생활 민주주의’로 ‘대한민국 정치’ ‘국회 민주주의’에 한 수 가르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병주 기자
into@news4000.com
다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