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신앙과 불교의 절묘한 융합점 속에 녹아 있는 고대를 만나다

왜 하필 무덤형태의 석굴인가

무덤이란 무엇인가? 그 이전에 죽음이란 게 우리 조상에게는 어떻게 인식되었을까? 주검을 모신 집인 무덤은 시대에 따라 형태와 부장품이 다르다. 우리는 형태와 부장품에 따라 어렴풋이 그 시대를 짐작한다.

고대신앙관에서는 죽음을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으로 받아 들였다. 영혼의 세계인 사후세계에서, 육신을 벗은 삶으로 존재한다고 보았고 평소 망인을 모시던 신하 혹은 몸종 그 부인을 함께 죽여 매장하는 순장제도도 그래서 있어 왔다.  

석굴양식의 사찰 보안암. 횡혈식석실고분의 무덤형태인 특이한 사원. 횡혈식설실고분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남진으로 함께 전래된 문화이다. 천정부분은 누수로 인해 시멘트로 덧입혀져 있다.

순장 풍습은 북방계의 부여의 풍습이었다고 위지동이전에서 전하고 있으나 AD 5세기경의 고령가야에서도 그 풍습이 무덤에서 확인되고 신라의 지증왕은 법으로 순장을 금한다고 했던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까지도 사후세계관에 따라 전국적으로 순장이 행해졌음을 엿볼 수 있다. 순장은 죽은 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사후세계에서도 동일한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행해졌던 의식인 셈이다.

400년경 고구려의 남진을 계기로 변화된 무덤 양식으로 ‘횡혈식 석실고분’을 꼽는다. 고령가야의 고분 가운데 횡혈식 석실고분에 순장의 형태를 갖춘 고분이 보인다. 횡혈식 고분은 폐쇄형 분묘가 아니라 집처럼 출구가 있는 무덤이다. 전실을 통해 주실로 들어가는 구조가 특징이다. 언젠가는 조상이 부활하여 이 공간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이 반영된 분묘였던 모양이다.

내부는 규모가 큰 판석의 구조로 뼈대를 만들고 외부는 작은 판돌로 쌓아 봉분형태의 석굴을 만들었다. 최근에 중수한 현관부분은 목조의 가구기법을 살려, 석굴암과 형태를 달리한다.

사천시 사남면 월성에서 발견된 횡혈식 석실고분에서는 사후세계의 양식이 든 가야토기가 함께 출토되었다. 횡혈식 석실고분. 이른 바 돌방무덤의 형태인 보안암 석굴은 왜 현세의 집이 아닌 주검의 집인 무덤 형태로 건축한 걸까?

사후세계의 영적공간인 무덤에 부처를 모심으로서 조상신을 숭배하는 그 가치의 계승과 아울러 부처가 머무르는 그 공간과 조상신의 공간을 동일시하는 고대신앙관을 표현한 형태는 아닐까?

견고한 뼈대와 들보 장석 아래, 감은 듯 뜬 듯 미묘한 눈매와, 은은하고 신비한 미소로 결가부좌한 석불에서 온화함을 느낄 수 있다. 얼굴 부위는 닳아 시멘트로 덧발라 형태를 복원했단다.


태양신 숭배사상의 계승

한편으로 본존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성에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 태양신 숭배사상의 계승이다. 정확히 동짓날 아침 햇빛이 무덤 안을 비추도록 건축한  이유는 뭘까?

24절기 가운데 첫 절기인 동지는 일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24절기는 태양력에 의해 자연의 변화를 24등분하여 표현한 것이며 음(陰)이 극에 달하지만 이 날을 계기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양(陽)의 기운이 싹트는 한 해의 시작을 의미한다.

해마다 새해아침이 되면 해돋이 인파가 몰린다. 이것도 옛날부터 전해 오는 태양숭배 사상의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동짓날 팥죽 새알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세시풍속이 전해 오는 것으로 봐서 사실상의 '설'로서 태양을 숭배하는 신라와 가야연맹체의 농경 태양숭배사상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새알 신앙' 역시 난생설화로서의 토속신앙 흔적을 전하는 대목이다.

석굴암의 부처도 마찬가지지만 보안암 석불도 동지가 되면,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본존의 이마를 비추게 건축되어 있다. 농경사회에서의 태양숭배는 어쩌면 당연하다. 태양이 비추어야 곡식이 자라고 태양이 비추어야 만물이 활동한다. 어찌 보면 한 해의 시작도 부처를 통해 열어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안암 석굴만이 갖는 특이한 양식이 한 가지 있다. 석불을 참배하며 예를 올리는 배례대가 석조로 만들어졌고 그 전면에는 귀신이 조각되어 있다. 그 문양을 도깨비로 보아야 할지 귀신으로 보아야 할지 모르지만 조각이 오늘에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귀면배례대. 도깨비 얼굴이라고도 한다. 돋을세김으로 조각한 귀신얼굴에서 힘을 느낄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이같은 귀면문양이 잡신의 범접을 막고 신성한 곳을 지키는 수호문양으로 동네 어귀나 절 입구에 세웠다고 한다. 석장승 혹은 천하대장군의 형식으로 오늘에까지 전해 오는 한편, 기와의 와당에조차 부적처럼 새겨둔 양식이 전해 온다. 석불이 모셔진 금당을 잡귀로부터 보호하려는 사천왕상처럼 말이다.

신라시대 전통방식으로 건축된 문무대왕 이견대. 이 누각의 용마루 부분에 신라의 치미와 귀면기와가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같은 귀면은 부정을 막는 토속적 의식에서 출발했다.


보안암의 본존불은 미륵불?

그렇다면 금당에 모셔진 석불은 누구인가? 기록에 의하면 이 암자는 한때 미륵암으로 불렸던 때가 있었다. 미륵불은 미래에 오실 부처이다. 미륵불이 하생하여 다스리는 땅, 불토정국은 인간의 이상향으로 아픔과 슬픔, 전쟁과죽음, 미움과 증오가 없고, 배고픔이 없는 완전복지세상이다. 또한 죽어서 태어나고 싶은 도솔천 역시 현세의 고통을 씻고 극락세계에 이르게 해주는 부처님이 미륵불이다.

미륵신앙은 난세의 백성에게 종교적 피안처였다. 불법에 귀의하여 도솔천의 미륵왕생을 바랐던 신앙은 매향의식에서도 읽을 수 있다. 사천은 매향비와 매향암각 두 가지의 문화재를 모두 갖고 있을 만큼 유난히 미륵신앙의 흔적이 많다.

신라는 불교국가로서 이같은 이상향을 국가중심철학으로 삼았고 미륵의 화현인 국선을 따르는 청년집단을 화랑이라 하여 삼국통일의 중심세력으로 만들었던 기록에서도 미륵신앙을 만나기 어렵지 않다.

5세기부터 시작된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왜에 의해 벌어진 전쟁에서 그 참화를 몸으로 겪은 것은 전장터의 군인만이 아니다. 섬진강의 요충지대에 위치한 이곳의 백성은, 어느 국가도 믿을 수 없는 지경에서 몇 세기동안 고통 받았을 것이다. 정복자에 반하는 민심이반 역시 타지역보다 심했던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치다.

이 같은 민심의 동요를 잠재우고 정복자의 백성을 만드는 데에 무엇보다 종교에 의지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통일신라의 오악중 하나인 남악(강주산), 이곳에 석굴을 짓고 백성의 흩어진 마음을 모으고자 한 신앙관이 미륵신앙이었다면 보안암의 석굴에 모셔진 본존은 미륵불일 수도 있겠다.

하늘이 내린 기후에 따라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백성들에겐 하늘과 조상만이 자신들을 지켜주는 신앙이었을 것이다. 삼국시대 전란의 참화를 섬진강과 남해를 잇는 이곳만큼 심하게 겪은 곳도 없었으리라.

보안암에 관한 관심이 없었던 시절에 '보안암석굴'사진을 본 적이 있다. 어느 누군가가 불심이 깊어 돌로 쌓아 만든 특이한 기도처겠거니 했다. '군립공원 봉명산'도 그랬다. '사천 도심 가까운데도 산이 많은데 이런 골짜기에다가 ... '하고 비난어린 곱잖은 생각을 품은 적도 있다.

바위 위에 고사리가 앉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할까? 천년은 족히 돼 보이는 석굴 외벽에, 푸르른 이끼와 고사리가 앉아 세월의 풍상을 읽게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경주를 세 번 다녀 왔다. 또 다음 편 글을 위해 봉명산을 오른다.산은 같은 산인데 느낌은 예전과 다르다. 이 강토를 지켜 온 먼 조상의 고통에 가슴이 저미고, 이 사찰의 내력만큼 깊은, 비구와 비구니의 극락왕생 비는 기도소리, 목탁소리가 환청이 되어 들려 온다.

조심스런  글의 진위와 관계없이 내 사랑스런 고향, 후대에 물려 줄 이 강토에 대한 절절한 사랑만큼은 더욱 깊어감을 느낄 수  있다.

봉긋하게 솟은 봉명산, 신라의 오악 가운데 남악(南岳)인 까닭에 봉(鳳)이 우는 산이라고 했다. 풍수지리의 남 주작은 봉을 지칭하고 봉황은 태양의 수호조이다. 이 이름의 근원은 신라의 오악사상에서 비롯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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