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사천을 빛낸 인물] 세종대왕

즉위 직후 조선팔도 최고 명당 사천에 태실 조성
1927년 일제에 의해 태실지 파괴… 석물만 남아
타 지역은 태실복원 관광 활용… 사천 역사적 과제

 

▲ 세종대왕 태실지는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일부 석물만 남아 있다. 본래 태실지 자리는 개인묘가 되어 있다.

세종대왕은 천하 명군이었다. 왕으로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성군이었다. 그는 왕에 즉위하자 사천에 그의 태실을 만들었다. 사천이 조선팔도 최고의 명당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명당의 기운을 얻어서 조선을 우뚝 세우고 싶어 했다. 그는 문화적인 면에 특히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조 실록에 태실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명당에 왕의 태실을 조성하면 반드시 나라가 흥할 것이라 믿었던 모양이다. 여러 지역의 추천이 올라왔을 때 사천을 선택하였다. 탁월한 선택이었던지, 세종시대의 문화발전이 빛을 발했다. 어느 시대 어느 왕이 이에 비교 하겠는가? 
 

▲ 세종대왕 어진.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의 태를 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후, 땅에 묻고, 그 위에 어떤 형상을 만드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왕실에서도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태실을 만들었다. 이를 3등급태실이라 하였다. 그 왕자 중에서 대군이 되면, 왕자 때 만들었던 태실에서 태항아리를 꺼내서 왕자의 태실보다 더 큰 태실을 만들었다. 이를 2등급태실이라 하였다. 그 대군 중에서 누군가 왕으로 등극하면 대군 때 만들었던 태실에서 태항아리를 꺼내서 대군의 태실보다 더 큰 태실을 만들었다. 이를 1등급태실이라 하였다. 세종대왕은 왕으로 등극하던 해에 왕의 태실을 사천에 만들었다.

참고로 태실을 만드는 문화는 중국에서 있었고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전하는 태실로 가장오래 된 태실은 김유신태실이라고 한다.

왕의 태실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땅을 2미터 정도 구덩이를 파 놓는다. 그 구덩이에 돌로 만든 태항아리를 넣는다. 태 항아리는 장독처럼 되어 있는데, 항아리 밑바닥은 구멍이 뚫려있다. 땅의 기운이 올라오는 혈이고 또한 혹시 물이라도 차면 빠져나가는 곳이다. 항아리 속에 태를 넣고 밀봉한 백자항아리와 태지(胎誌)를 넣었다. - 태지를 지석(誌石)이라고도 한다 - 태지는 좌우 1자로 된 돌판으로 태에 대한 기록이다. 누구이며 언제 태어났다는 기록이다.

1927년 우리나라 왕의 태실은 일제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세종대왕태실도 파괴되었다. 세종대왕태실은 곤명 소곡산에 있었다. 20년 전, 필자는 사천시에 보관하고 있는 ‘세종대왕 단종대왕태실의궤’ 3권을 해설번역하여 책으로 만들기 위해 전국의 태실을 조사하고 구체적으로 세종대왕태실, 단종대왕태실을 조사한 바 있었다. 그때 일제가 세종대왕태실을 파헤치기 위해 일본순사와 조선인 노동자 2명이 태실이 있는 마을에 와서 묵었다고 전해주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조선인 2명의 이름도 알려주었다. 그 중 한명은 태실을 파다가 옴이 옮아서 몇 개월간 고생을 했다고 했다. 작업은 2일 동안이었다고 하였다. 태실의 석물은 망가뜨리고 태항아리와 태지를 가져갔다고 했다.

얼마 전, 조선왕조 때 기록된 의궤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천에 보관중인 태실의궤 3권도 보물로 지정되었다. 1601년, 1730년, 1734년에 만들어진 의궤다. 그 중 1601년에 만들어진 의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의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몇 백 년 잘 보관되어오던 의궤가 습기로 인하여 글자가 제법 멸실되어졌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다행스런 일은, 20년 전, 태실의궤를 번역하기 위해 책 3권을 시청에서 가져와서 번역작업을 하였는데, 그때 의궤를 조금이라도 함부로 다룰 수 없어 필자가 미리 복사를 해서 복사본을 놓고 번역을 하였다. 지금은 비록 시청에 보관중인 원본의 글자가 많이 멸실되었으나 당시에 복사해 두었던 복사본에는 글자가 선명히 남아 있다. 만약 그 당시에 이 의궤가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되었더라면 복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흩어져 있던 태실의 석물들은 해가 지날수록 하나씩 없어져 가고 있다. 아마 이대로 두면 거의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이쯤에서 단종대왕태실에 대해 한마디 하자.

단종의 태실을 두고 사천과 경북 성주가 매우 민감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다. 사천에서는 단종대왕태실이 사천에 있다고 하고 성주에는 성주에 있다고 한다.

성주 선석산에는 세종대왕의 자녀와 왕손의 태실이 있다. 이 왕손이 단종의 태실이다. 그러나 이 태실은 단종이 왕으로 등극하기 전 세종대왕의 왕손이었을 때의 태실이다. 3등급태실이다. 얼마 전 사천의 노인분들께서 ‘세종대왕이 사천에 태실을 조성할 때 왕손(단종)을 사랑하여 같이 태실을 사천에 만들었다’는 어이없는 발언으로 불필요한 공격을 사천이 받고 있다.

사천에 단종대왕태실이 있다. 언제 조성하였는지, 태지가 있었는지, 1등급의 태실에 규식이 정확한지 등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태실의궤가 있고, 단종태실의 비가 남아있고, 조선시대 예조에서 기록한 태봉등록에도 사천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풀어내지 못하는 문제도 남아있다.

세종대왕과 단종 태실의 터는 개인 소유로 되어 있다. 게다가 이미 묘지로 사용되고 있다. 남아 있는 세종대왕의 석물, 단종대왕의 석물을 바탕으로 복원하면 어떨까?

이미 여러 지역에는 태실을 복원하여 관광용으로 역사자료로 제향을 지내고 있다.

세종대왕 그 특별하신 대왕의 태실이 사천에서 나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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