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병주가 만난 사람] ⑧ 인도네시아식당 주인장 아나수피아나 씨

“아이들 초등3까진 눈물로 지새워”
끊임없이 하는 말 “당당하게 살아라”
“세계인들 찾는 식당 겸 쉼터 됐으면”

▲ 사천에서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식당을 운영하는 아나수피아나 씨와 그의 둘째 딸 장해린 양.

[뉴스사천= 하병주 기자] 식당에 들어선 건 일요일 낮 12시께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왁자지껄 이야기를 섞어가며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어 나지막한 음악소리도 들렸다. 충전 중인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아 식사 중인 손님들 중 누군가가 켜 놓은 듯 보였다. 한쪽 벽 진열장엔 처음 보는 과자류가 다양하게 채워져 있고, 건너 편 벽에는 영어로 표현된 메뉴판이 붙어 있었다.

사천에서 만나기엔 조금은 낯선 풍경임에 틀림없는 이곳은 벌용동 삼천포터미널 근처이자 홈플러스 삼천포점 맞은편에 있는 인도네시아식당이다. 식당 주인은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아나수피아나(45) 씨. 그녀는 2002년에 늑도 사나이 장순철(50) 씨와 결혼해 세린(15), 해린(14) 두 딸을 뒀다. 5월 20일 세계인의 날을 앞두고 한국에서 엄마로 살아가는 결혼이주여성의 삶을 잠시 엿봤다.

“저 애들은 다 동생들이에요. 주로 배를 타죠. 남편도 배를 타니까 남 같지 않아요. 몇 년 전부터 저런 친구들에게 밥을 해줬어요. 처음엔 집에서 해줬는데, 같은 아파트 이웃들에게 좀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마침 여동생이 김해서 식당을 하는데, 잘 하는 것 같아서 저도 용기를 냈어요.”

아나수피아나 씨는 2014년 10월에 처음 식당 문을 열었다. 그녀 얘기처럼 인도네시아 동생들의 요구와 성원으로 창업을 한 셈이다. 메뉴는 모두 8가지. 그리고 인도네시아인 취향에 맞는 음료 몇 가지를 곁들였다. 장사는 어떠냐는 물음에 그녀는 수줍은 미소로 손사래를 쳤다.

“돈 안 돼요!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거지. 재료비가 비싸서 정말 얼마 안 남아요. 한 10(퍼센트)이나 남을까.”

세상의 3대 거짓말 중 하나가 장사 하는 사람들의 ‘이윤 안 남는다’는 말이라 했던가. 그러나 그녀의 말이 거짓이란 생각은 안 들었다. 식당 위치를 굳이 삼천포터미널 근처로 잡은 이유도 외국인노동자들이 쉽게 찾아오도록 배려한 것이었다니, 오히려 한국이 낯선 땅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쉼터라도 제공하려 했다는 그 속마음이 와 닿았다.

인도네시아식당 운영시간(화요일엔 쉼)은 점심 무렵부터 밤 10시까지다. 처음엔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등 외국인노동자들이 주로 찾았지만 지금은 한국인들이 더 많이 찾는단다. 그래서 한국인 입맛에 맞게 음식 맛에도 조금 변화를 줬다.

사실 그녀의 요리 솜씨는 이미 오래 전 인정받았다. CJ제일제당이 2010년 주최한 ‘도전! 한쿡(韓Cook) 요리왕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국내에 거주하는 다문화가정 주부들을 대상으로 열린 첫 전국 규모 요리 대회였는데, 아나수피아나씨는 한국식 갈비찜에 인도네시아 전통 향신료 빕소스, 투무라파우더, 코코넛가루 등을 첨가함으로써 한국 갈비찜과 인도네시아 전통음식과의 조화를 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삼천포터미널 근처에 있는 인도네시아식당.

그녀는 대회 우승으로 CJ엔시티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할 기회가 있었으나 포기하고 말았다. 두 딸과 가정이 더 중요했던 까닭이다. 자연스레 결혼 초기, 육아로 힘들었던 시절로 이야기는 옮겨갔다.

“그땐 너무 힘들었죠. 애는 둘이나 있는데, 저는 말이 안 통하고. 애들 아빠는 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애들이 아프기라도 할 땐 정말 막막했어요. (짧은 침묵 뒤) 아, 옛날 얘긴 진짜 하기 싫은데….”

아나수피아나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프고 힘들고 외로웠던 옛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듯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자꾸 불러오게 할 수 없어 몇 년을 건너뛰었다. 두 딸은 어느 새 초등학생이 됐다.

“애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저는 한국말을 조금씩 알아듣고 할 줄도 알게 됐어요. 그런데 아이들은 그때를 가장 힘들어 했어요. 유치원 때까지는 그러지 않았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니까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은 거죠. 3학년 때까지 울음이 떠나질 않았던 것 같아요. 저도 많이 울었죠.”

그녀는 사춘기에 접어든 두 딸이 걱정스럽긴 매한가지다. 그래서 “스트레스 받지 마라” “당당하게 살아라” 이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달고 산다고 했다. 여기에 대한민국 엄마들이 갖는 대표적 자식 걱정인 교육 걱정까지 붙들고 있었다.

“큰 애 꿈은 음악심리치료사예요. 예전에 많이 힘들었을 때 음악이 큰 위로가 됐나 봐요. 그래서 그 경험을 살려 보겠다는데, 모르겠어요, 잘 할는지. 둘째는 공부를 제법 하긴 하는데, 한국에선 경쟁이 워낙 세서…”

아나수피아나 씨는 두 딸이 어느 정도 실력을 쌓은 다음 취업을 위해 인도네시아로 가겠다고 한다면 어찌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단다. 내심 바라는 바이기도 한데, 애들에겐 아직 그런 마음이 없는 것 같아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하다고.

그녀는 주위에서 한국식 이름으로 개명하라는 권유를 가끔 듣지만 그럴 생각이 아직은 없다.

“제 성은 무시야르예요. 이름이 길다 보니 성을 잘 안 쓰죠. 한국에 시집 온 지 15년 지났는데, 제가 가졌던 많은 걸 버리고 또 변했죠. 이제 남은 건 이름뿐인 것 같아요. 이것마저 버리면 너무 섭섭할 것 같아요.”

인도네시아인으로서 정체성과 자긍심도 잃지 않은 아나수피아나 씨. 당당한 그녀의 바람은 더 많은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세계인들에게 그녀의 음식 솜씨를 보이는 것이다. 물론 한국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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