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사천을 빛낸 인물] 관포 어득강

▲ 서포면에 있는 작도정사.

어득강(魚得江)은 호가 관포(灌浦) 자는 자유(子游)다. 이름과 자와 호가 모두 물과 관련이 있다. 어득강을 그대로 해석하면, ‘물고기가 강을 얻었다’라는 의미고, 호는 ‘물을 대는 포구’, 자는 ‘수영하는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그는 1470년에 태어나 1550년에 세상을 떠났다.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대사성에까지 올랐다. 1532년 곤양군수로 재직하였다. 곤양군수는 주로 무관이 맡았는데, 문관인 관포가 군수로 재직한 일은 약간 의외의 일이나 사천의 역사에서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는 시인이었다. 성격도 천진난만할 정도로 순진하고, 맑고 명랑하여 엄정한 조정의 업무는 별로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물, 특히 바다를 좋아했던 그는 곤양에 대한 애정이 많았던 모양이다. 멀리 있는 퇴계 이황을 곤양으로 불러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30살 정도 연하인 구암 이정이 있는 사천으로 여든이 다되어 가는 나이에도 말을 타고 찾아가기도 여러 번 하였다.

▲ 4월 26일 작도정사에서 관포 어득강 선생을 기리는 석채례 모습.

곤양은 바다를 접하고 정기가 높은 산들이 있어 그의 성정에 매우 흡족한 곳이었을 것이다. 곤양읍성의 북쪽은 아찔한 절벽이 있고 그 아래에 맑은 물이 흘러 바다로 이어졌다. 오늘에 이르러 물길이 줄어들어 조그만 개천 같았지만 조선시대에는 배가 다녔다고 하니, 높은 절벽 아래 배 띄우고 시를 즐겼던 그의 모습이 상상이 된다. 특히, 지금도 절벽에 ‘적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소동파의 ‘적벽부’를 어찌 연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관포 어득강은 사천사람이 아니다. 그의 선조는 진주에서 살았으니 그도 진주에서 태어났을 것이라 추측한다. 만년에는 고성에서 살았다. 오늘날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그의 일생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동주집(東州集)』이라는 문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단지 『관포선생시집(灌浦先生詩集)』이 남아 있어 이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따라가 볼 수밖에 없다. ‘동주집’이 세 번 간행되었는데, 초간본은 1558년 사천곤양에서 간행되었다. 행여나 사천에서 이 문집이 나타나면 얼마나 좋으랴!

관포선생이 사천에 1년 6개월 재직하였다. 우리나이로 63세에서 65세까지였다. 비록 짧은 시기였으나, 지금껏 사천 사람들의 가슴 속에 그는 남아 있다. 그가 퇴계를 곤양으로 초빙하여 더불어 시간을 보냈던 곳에 이곳 유림들이 작도정사(鵲島精舍)를 지어 기념하고 있다. 구암 이정선생은 젊은 시절에 관포에게 글을 배웠다.

▲ 관포 어득강 선생의 ‘고임원정’ 시를 지역 서예가인 순원 윤영미 선생 쓴 글.

관포는 비록 사천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천에 유학과 문학의 초석이 된 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천의 인물로 자리매김하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사천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자주 부르다가 관포와 가까워져서 서랍 속에서 우연히 그의 유고를 찾아낼 수 있으면, 사천의 문화를 격상시키는 일만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시문화가 격상될 것이라고 믿는다.

아마 그가 새겼으리라고 추측하는 곤양읍성 절벽에 새겨져 있는 적벽도 복원되어야 한다. 그래서 더불어 아름다웠던 바다로 이어졌던 곤양강변의 절경을 복원하고 절벽 아래에 조각배라도 띄우는 운치가 만들어지도록 곤양면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이 시는 축동면 구호에 있었던 ‘아호정사(牙湖精舍)’의 시 중의 한 수이다.

三千海外舟如葉
十水橋邊檣似林
夜夜賈船窓下過
停橈應聽主人琴

삼천포바다 바깥에는 배가 나뭇잎 같고
십수교 가에는 돛대가 숲과 같네
밤마다 창 아래로 지나가는 장사배는
노를 멈추고 아마 주인의 거문고 소리를 듣겠지.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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