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특사'보다 '친일잔재청산'에 관심가져야 할 때"

얼마 전 단종태실지에 관한 보도를 보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친일파 최연국의 묘지로 전락한 역사유적도 어처구니 없지만, 이를 국가기관이 환수를 포기한다는 기사였다. 이유인 즉, 불하 시기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임명시기보다 앞서서 환수할 근거가 희박하다고 보는 뉘앙스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한 번에 부르기에 혀가 꼬이는 법률적 기구가 내린 결정이었다.

단종의 어태가 모셔졌던 태실지. 태봉과 비석은 밀려나 수호석으로 변해 있고 태실터에는 최연국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세조에 의한 왕권의 찬탈로 단명한, 비운의 임금을 역사는 두번 죽이는 것은 아닌지.

세종 즉위 원년, 임금의 태가 묻혀 있는 곤명을 '곤남군'으로 승격한다. 그리고 임금의 애손 단종의 태를, 세종의 태가 묻힌 바로 옆에 자리를 정한다.  왕자가 출생하면 궁내에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길일과 길지를 정해 안택사로 하여금 관장케 하고 간수군을 세워 태봉을 지키게 하였으며,  그 권역의 내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였다. 속대전(典)에 의하면, '왕은 300보, 왕세자는 200보를 경계로 수목을 길렀으며 , 화소처 내에서 수목을 도벌하거나 시신을 매장하면 원능의 수목을 도벌한 율로써 처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군 세종대왕은 태실안위제 등으로 백성에게 불편을 끼친다 하여 즉위 20년에 경북 성주로 후손의 '태'를 모두 옮겼다.세종 봉태에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태실은 3년에 한번, 태실안위제를 거행하며 지역 군수의 큰 제례중 하나였으나 세종 20년 백성들에게 군왕의 일로 폐해가 많다 하여 왕세자 문종의 태를 제외하고,  17왕자를 비롯, 단종의 태실 18기를 한 곳으로 모아 관리하였는데 그곳이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이다.

하지만 천하길지 남악의 정신과 세종대왕의 백성 사랑의 정신을  기리고 보존키 위해, 지역 유림은 이 자리를 보존해 오고 있었다. .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로 설치된 일제통감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식민의 기본계획을 진행하고 조선의 물산과  곡물 생산량의 기초인 토지조사의 법적인 조처를 차근차근 준비해 간다. 식민통치의 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민족정신과 국왕의 권위를 말살하는 계획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던 것이 한일합방을 발표하고 조선총독부의 헌병통치를 감행하면서, 전국적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지역의 왕실소유의 땅을 국유화하고 친일파 중에 적당한 시기에  불하한 것이다. 이같은 행위는 민족정신의 말살에 다름없는 행위임이 분명한 사실이다.

고령토, 카올린이라 한다. 카올린은 중국의 카오링(高陵)지방의 백토에서 이름이 생겼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수을토'라하여 백토 중에 최고의 산지로 곤양과 하동을 꼽았다.

일본 메이지유신의 성공 계기는 무얼까?  일본막부가  나가사끼를 개항하고 네델란드를 통한 '도자기무역'이 그 시원(始源)이다. 동양의 아름다운 도자기는 유럽에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고 일본은 그 대가로 서구문물과 기술을 도입하면서 비롯된 개혁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끌려간 도공이 그 기술의 밑천을 제공했고, 여기에 일제통치가 시작되면서 도자기 제조의 흙까지도 일본으로 반출해 갔다. 고령토, 이 백색 태토의 반출, 지금은 수출이라는 당당한 이름으로 삼천포항을 통하여 팔려 나가지만 일제에는 그러지 못했다.

100년이 다된 수탈의 흔적을 지금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있다. 하동과 곤양은 예로부터 고령토중 고령토라 불리는 '수을토'산지가 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가 곤양 고동포다. 진삼선 신작로가 닦이면서 그 반출로가 삼천포로 바뀌기 전까지 숱하게 많은 우리의 고령토는 일제의 부흥을 위해 반출된 것이다.

곤양 고동포 쓰러진 창고의 잔해물 속에서 찾은 고령토 더미. 일제초기부터 고동포항을 통해 다량의 고령토가 일본으로 반출된 증거이다.

명치 45년2월10일( 1912년2월10일)자 아사히신문이다. 잔해물 속에는 조선총독부가 발행했던 비슷한 시기의 매일신보도 보인다.
일제에 지은 창고와 포구가 아직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광포만의 뱃길은 예나 지금이나 바다로 열려 있다.

광복64주년이다. 대규모의 특별사면을 통해 서민범죄를 면하여 다시금 갱생을 도모한다고 연일 언론에 오르내린다. 광복이 뭔가? 빛을 되찾은 날이 아닌가? 일제의 억압으로 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던가? 수많은 애국선열의 피땀으로 이룩한 오늘의 광영이 아니던가?

돈이 되면 일제보다 더 앞서 우리 민족을 억압했고, 그들의 뒷배를 믿고 그 돈으로 일으킨 그 부를 우리는 온전히 인정해야하는 법치국가라면 너무도 한심하다.

최연국이 중추원참의 이후에만 친일행위를 했다고 보는 이가 얼마나 될까. 단종태실지를 불하 받고 중추원참의가 되는 과정에 일제가 뒤를 봐줬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 아닌가. 실제로 그는 당시 일제 수탈의 첨병 역할을 했던 각종 금융 관련 기관에 있으면서 재산을 늘렸다.

최연국이 사천수리조합장 시절 발행한 상장. 수리조합과 금융조합은 일제의 대표적 수탈기구였다. 미곡 공출과 토지를 이용한 대부를 통해 양민의 토지를 몰수 수탈했다.

마음 같아선 '친일파 최연국 재산 환수를 위한 시민소송단을 구성해 법정에서 다퉈보자'고 사천시민들에게 제안해 보고 싶다.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가에 개인의 사욕이 먼저 자리한다면 사회와 국가를 논할 자격이 없다.또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보호해야 할 가치를 업신여기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혼이 없는 사회이다.

해방 64주년을 맞아 이 가치 하나만이라도 지켜낸다면 역사의 혼불이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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