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교류 루트 복원으로 '역사와 관광'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30년도 더 된 이야기다. 남해안 그것도 밤에 운항하는 연안여객선이 있었다. 부산에서 출발한 여객선인 금성호는 제법 덩치가 큰 배였다. 그 배는 사람만 운송하는 게 아니라 물류도 같이 이동했다. 이 배가 충무항(지금의 통영)에 도착한 게 밤 9시경, 삼천포항에 도착하면 새벽 3시쯤 된 것으로 기억한다. 연안 여객선은 다시 뱃고동을 울리며 여수항으로 향했다. 여수항에 도착하면 새벽나절쯤 됐을 게다.

부산과 여수를 이어주던 연안여객선 금성호. 육상교통 발달로 사라지고 지금은 추억속에서나 살아 있다.

그 시절은 낭만이 있었다. 밤바다 바람이 차긴 했어도 배 굴뚝의 온기에 몸을 녹이며, 먹던 충무김밥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연하게 신문지 맛(?)이 베인 무우김치에 꼴뚜기무침과 같이 먹은 속 없는 김밥을 생각하면 군침이 돈다.

기자가 어린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연안여객선이 여수-부산간을 다녔다. 쾌속선인 엔젤호, 비너스호 등이 제법 고급여객선이고 대중여객선은 금성호였다.

그 당시는 도로 여건이 열악했다. 통영-사천간 국도33호선은 비포장도로였고, 차도 그렇게 대중화되기 전이라 편한 여행을 할려면 배를 타야 했다. 삼천포 서항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시장을 보러 오는 사람, 경매 물건을 옮기는 인부, 당시는 쥐치를 가공해 만든 '쥐포'가 국민 영양간식으로 각광을 받던 때라 집집마다 고사리손이더라도 힘이되어, 데리고 나가  쥐포 발장에 손을 보탰으니까...

지금은 모두 옛날 이야기로 전해오고, 많은 어민 특히 칠십 나이를 넘긴 어르신은 연신 '그때가 좋았지...'하며 깊은 상념에 젖어 들어, 추억이 돼 버린지 오래다. 망각의 고개 저너머로 해양산업은 떠밀려 가고, 해양과 수산이라는 그림자 뒤에는 사양산업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삼천포를 방황하게 만든다. 가능하다면 옛 영화를 되찾을 묘안을 생각해 봐야 한다.

얼마전 뉴스를 봤다. 남해 창선 인근 바다에 쳐둔 정치 그물망인 죽방렴에,  쓰레기가 뒤엉켜 몸살을 앓고 있다는 내용이다.  어민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렇다. 비가 일시적으로 쏟아지면, 홍수로 인해, 산이나 하천 주변의 쓰레기가 떠밀려 온다. 남해연안의 정치그물과 죽방렴 등은 이 물길을 막아 물고기를 잡는 까닭에 자연 그물 안에 쓰레기가 들어 오고, 이같은 불상사는 해마다 되풀이 된다.

구라량 중간의 초량섬, 유속이 빠른 물길에 대를 엮어 만든 그물로 막아 물고기를 잡는 원시어업 죽방렴,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지면 조류를 따라 쓰레기가 떠밀려와 몸살을 앓는다.

그래서 생각난 게  대마도 표류 쓰레기다.  남해 주민과 같은 고통을 대마도 주민도 해마다 겪고 있다.  아마도 지금쯤  대마도 연안은, 쓰레기 홍수로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 부산의 모 대학은 정기적으로 봉사단을 보내 해류에 떠밀려 온 쓰레기를 치운다고 한다.

다녀온 봉사단에 의하면, 종류도 가지가지란다. 펫트병, 술병,과자봉지에 크게는 냉장고에 폐그물까지 온갖 것이 망라되어 폐품박람회장 같더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전한다. 대부분 한글상표가 부착돼 있어, 우리 것이 아니라고 발뺌도 못한다고.

중국 초원지대 사막의 모래바람이 계절풍을 타고 넘어 오는게 중국발 황사 공해라면, 장마와 태풍에 의한 집중 강우로 떠밀린 부산물은, 대마도 주민 입장에선 한국발 쓰레기 공해가 된다는 이야기다.

대륙과 일본 열도 사이에 수 만 년을 두고, 되풀이 되었을 자연현상이다. 2천년 전쯤에 우리 고장에 살던 조상도 원시항해로 이렇게 건너 다녔다는 걸 안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오로지 돛배에 의지한 채 해협을 건너 다녔다는 게 경외롭다.

한국과 일본사이에 대한해협은 총 연장 170km 정도다. 거제도와 함께, 징검다리 처럼 중간에 큰섬 세개가 대한해협 사이에 놓여 있다. 그 하나가  대마도이고 또 하나는 이름도 낯선 이끼섬이다.  한반도의 거제도 남단에서 첫 징검다리 대마도까지는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정도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이다. 마찬가지로 대마도의 이즈하라에서도 이끼섬을 눈으로 볼 수 있다.

개울의 징검다리처럼 거제도 대마도 이끼섬이 대한해협 사이에 놓여 있다. 먼 옛날 우리 조상은 자연이 만든 교역로를 바탕으로 이렇게 건너 다녔다.

먼 옛날 우리 조상은 바람과 해류를 이용, 그렇게 건너 다녔다. 그러다가 근년에 와서 왜구의 노략질로 바다는 진절머리를 쳤는지 지금은 그 해상루트가 사라져 버렸다. 삼한시대 철기교류의 흔적이 있건만 학자들은 코웃음을 친다. 이유는 무역이 활성화되기엔 너무 이른 시기라는 것이고, 간혹 조공을 위해 간헐적인 왕래가 있었다고 지나친 비약을 말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뱃사람은 상식으로 알고 있겠지만, 대한해협은 쿠로시오해류가 흐른다. 일본열도의 남단을 통해 흘러 들어온 해류는 서해안을 돌아 발해만으로 ,또 한 지류는 대한해협을 지나 동해안 울릉도 근해에 다다른다.

해류의 속력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대충 봄 가을경에 더 빨라 지는데 시속 6노트 정도란다. 해안 도서인 늑도에는 조석 간만의 차에 따라 조류가 형성된다. 이 조류와 바람을 이용해 욕지도를 지나 매물도에 이르면 쿠로시오 해류를 만나게 되고 이 해류는 곧장 배를 대마도로 밀어 낸다.

돛과 해류, 그리고 조석간만으로 발생하는 조류를 이용해 현해탄을 넘나던 조상을 우리는 잊고 산다. 해적의 노략질이건 국가의 정책적 항해금지이건 역사가 근세를 넘어오며 바다는 서서히 잊혀져 갔다. 사진은 사천만 앞바다에서 세일링하는 요트, 돛을 펴고 유유히 흘러간다.

사천의 늑도는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를 망라하는  2천년 전의 고대유물의 보고이다.  중국 삼국시대의 반량전을 비롯, 일본 고대기의 야요이토기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고고학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의 열쇠를 지닌 고대문화 풍속 생활상에 이르기까지 한중일 고대 유물의 백화점인 셈이다.

진한시대부터 낙랑,대방, 왜에 철을 수출한 근거인 철정(=덩이쇠)을 비롯, 가야 혹은, 그 연맹국가로서 활발한 대외교역이 있어온 부족이 지배했고, 어쩌면 신라의 기원과 고대 가야연맹체의 형성배경을 풀어 줄 열쇠를 가진 귀중한 역사보고이다.그 역사적 가치는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하고 '해상교역'이야기를 이어가자.

섬의 본래 이름은 '구라도'이다. '소의 멍에를 닮은 섬'이란 모양에서 유래한 구라와 육지의 협소한 해협이 있는데 이를 구라량이라고 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고려 수군만호가 주둔하던 해군기지가 구라량 어딘가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방진굴항의 이름도 구라량이 변해 고착된 이름이 아닐까 주장하는 사학자도 있다. 

근대 항해술의 발달로 해양과 대륙세력의 교역루트가 먼 옛날부터 김해 부산지역이었던 것처럼 인식되고 있으나 이는 아전인수인 셈이다. 인간의 힘을 동력으로 이용했던 것은 삼국시대 특히 장보고에 의한 해상교역이 활성화 된 즈음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돛과 해류'가 만들어 준 루트가 주류였다.

고대의 원양항해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달랐다. 쓰시마라는 지명에서도 잘 나타나는 것처럼 쓰시마는 한자어의 뜻글로 진도(津島)이다. 그러나 표기는 대마도(對馬島)이다. 다시 말해서 마한(삼한시대의 백제지역)과 마주보는 곳이라는 뜻이다. 대마도도 상도와 하도로 큰 마을이 나뉘어 있는데 영주가 살았던 곳이 이즈하라(嚴原)라는 하도의 끝이고, 또 하나는 히타카츠(比田勝)라는 북쪽 상도의 항구다. 쓰시마는 왜 항구가 둘로 나뉘어 발달했을까라는 의문의 해결점은 '교역루트'이다. 쓰시마는 섬의 형세가 북동방향으로, 대한해협에 대각선으로 길게 누워 있다. 당시에는 진해와 김해에서 쓰시마로 접근하는 직항로 개설이 불가능할 정도로 해류의 물살이 강했다.

반대로 쓰시마 북단의 히타카츠에서는 쉽게 접근이 가능했다. 한반도 항해의 출발지 히타카츠를 벗어나면 해류의 힘만으로  김해와 동래에 다다른다. 다시 쓰시마로 돌아 오려면 진해만을 거쳐 거제의 견내량을 지나고 사량을 지나 구라량에 이르러 곡식을 싣고 다시 욕지도 매물도로 나와 해류를 타고 이즈하라항으로 들어 오는 코스이다. 그러니 자연히 마한에서 물자가 들어 온다 하여 대마도인셈이다.

늑도, 구라섬 삼한시대 삼국교역의 중심에서 번창했던 섬이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육지화 되었고 삼천포를 찾는 관광객과 바다낚시객들이 즐겨 찾는 섬으로 변했다.

근거를 설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해전사의 기록이고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이다. 쓰시마의 히타카츠에 집결한 풍신수길 대함대가 처음 상륙한 곳이 부산 동래이다.  견내량은 한산도 앞 바다로 나가는 보급루트였지만 이순신함대에 의해 몰살을 당하자 보급로의 차단은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했고, 전쟁이 종결되고 돌아가려는 퇴각로 역시 사천만이었다. 노량은 사천만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이순신장군은 이처럼 해류와 조류의 흐름을 훤히 꾀고 있었음에 노량해전에서도 대첩을 거둘 수 있었다.

이렇듯 우리 사천 곳곳의 유적에서 임진 전란의 흔적이 존재하고, 주요 해전의 전선이 형성된 것은 서해 평야지대와 곧바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이전에, 해양세력의 귀환루트가 존재하기에 가토기요마사와 모리히데요시 등 풍신수길의 정예 장수들이 주둔하게 된 배경이다. 사천의 선진과 곤양을 통해서 많은 도공과 문화유산 등이 일본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전쟁은 과학의 비약적 발전을 만들어 낸다. 사람의 힘에 의한 '노'라는 것이 추진동력으로 설계되면서 해류는 더 이상 장애가 될 수 없었다. 풍신수길의 사후, 조선에 화해를 청한 쓰시마 번주는 동래등에 개항장을 얻었고 역사에서 서서히 사천은 잊혀져 갔다.

삼천포! 수산항으로서의 영화도, 어자원 고갈이라는 멍에와 한일어업협정에 따른 손실로 그 번성했던 어판장의 질펀한 바닷사람의 목청도 차츰 사라져 버렸다. 포기할 수 없는 수산해양도시의 꿈은 시련의 계절에 빠져 들었고 20년 넘게 사양산업의 늪에 빠져 오늘도 허우적댄다.

해양수산산업의 한 축으로 해양 체험레저산업이 부각되고 있다. 삼천포의 발전이 이같은 기류를 빠르게 읽고 대응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을까?

"시류를 읽지 못한 게야...  많이 바뀌었거든...  바다일이 안 되는걸, 나랏님 탓을 해서 뭐해!!" 장기 두는 노인 한 분이 담배를 연거푸 피워대며 한탄조로 하시는 말씀이다. "사람이 없는 게지... 뱃사람 물질이 좀 억센 일인가, 나도 우리 자식 험한 일 안 시키려는 세상이니 말 다 한기지..."

2012년 삼천포 신항이 준공된다. 또한 배후부지에는 나름 도로기반이 잘 조성되어 있고 국도3호선은 그 전에 완공될 태세다. 수도권과 중부권의 접근은 항공로이던 고속도로이던 시원스레 뚫려 있어 훌륭한 인프라가 갖추어진 셈이다.

정부는 레저해양산업 육성을 계획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수엑스포 유치를 계기로 남해안 개발에 대한 프로젝트를 경남과 전남도가 함께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삼천포항은 무역항이다. 다시 말해 세관, 출입국 관리, 검역에 해당하는 CIQ기능이 갖추어 진 국제항이다.

우리는 여러 관광축제와 유람선조합의 마케팅을 통해 가능성을 확인했다. 해양 관련 레저산업의 육성은 체험을 통한 머무르는 관광의 핵심으로 평가한다.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와 인적 물적 해양교류를 활성화하여 이들 축제로 관광사천의 미래가 함께 기지개를 켜게 되지 않을까?

사천 실안의 아름다움과 함께 레저산업으로서 해양레포츠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걸음마 단계, 더 체계적이고 연계성 높은 인프라 투자가 시급하다.

해양관광 산업이 활성화 되려면 자동차산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파워보트나 요트등의 레저기구 제조산업이 활성화 되려면 '마이카'붐과 같은 '마이쉽'붐이 정부차원에서 뒷받침 될 때 가능하다. 경기도가 앞서서 지원하는 것처럼 해양레저산업의 인프라와 컨텐츠를 다양하게 채워 가야 한다.

'삼천포 실안낙조를 크루저요트에서 즐기자' 이 하나의 아이템만으로도 국제적 메이커로 키울 수 있다. 시민과 도민 저변에 요트문화가 더는 사치 레저가 아닌 해양관광 문화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요트계류장의 시설확충과 레저 면허시험장 등에 관한 지원으로, 사천을 제외한 인근 해안 지자체에는 즐기는 레저문화의 붐이 이는 분위기다.

실안 노을의 가치를 금액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그 노을과 체험 레저의 일환으로 노을세일링이 조만간 관광상품으로 전국에 소개될 예정이란다.

관광 뿐만 아니라,  지역 특산품에도 지원이 따라야 한다. 잡는 어업에서 기르고 가공하는 어업으로의 지원, 영세가공업에 대한 정책적인 배려, 포장과 위생에 관한 지원과 아울러 마케팅 등에 전폭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지역이 함께 산다.  이와 함께 연계 사업으로서, 소형선박 제조를 위한 조선공단 조성도 필수적  사업이다. 어느 중소조선연구소의 교수 말대로 지금의 시대는 인문 문화적 접근이 선행되어야 할 시점이다.

"한국은 산업적으로 혹은 기술적으로 요트 분야에 관심이 많지만, 대형 조선과 달리 요트는 일반인들의 관심이 적극적으로 따라 주어야 발전할 수 있는 분야라서, 한국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유발시키는 방식의 저변화 전략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수요 유발 방식은, 공학기술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인문학적 해양문화 개척 의지'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사천의 발전에 있어 해양개척의 열의가 빠진다면 '인문학적 해양문화의 개척의지'의 실종을 의미한다. 역사를 관통한 해양문화의 전통을, 미래 산업으로 꽃 피울 수 있는 지속적인 행정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

해양레저 일환인 크루저 요팅, 대중에게 해양을 친숙하게 접근시키는 대표 관광산업이다. 머무르는 관광이 되기 위하여는 체험레저는 필수다.

역사와 관광이라는 두 마리 토끼는 한꺼번에 잡히지는 않겠으나 꾸준히 노력하고 지방정부 차원의 고민을 계속해 나갈때  그 결실이 서서히 맺힐 것이다. 관광은 굴뚝 없는 최고의 부가가치 산업임에도 아직 결실을 제대로 본 지자체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기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안관광단지는 실패가 아니다. 개발의 방향과 목표를 정확히 잡고 단번에 한 업체를 통한 대규모 개발이기보다 중소업체의 컨소시엄개발로 전환한다면 최고의 인프라인셈이다. 실안의 낙조, 이를 통한 낙조세일링체험, 교육, 해양레저산업의 부활을 이곳에서 불을 지필 수 있다면 이는 분명히 사천의 기회인 셈이다.

크루저 요팅으로 대마도를 횡단하고 이를 넘어 일본 큐슈로, 오끼나와로, 대만을 경유해 동지나 일주해서 고대 해상실크로드를 이어가는 여행이 사천에서 불가능하지는 않다. 사천은 대양으로 항상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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