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병주가 만난 사람] ⑫ 서예가 순원(筍園) 윤영미

▲ 순원 윤명미 작가를 그의 개인전 ‘문자, 아름다운 메시지’ 전시회장에서 만났다.

글자가 주는 매력, 그 깊이는

“제가 하는 일이 오롯이 글자만으로 표정과 감정을 담아 보여주는 거죠. 그게 서예의 매력이기도 하고요. 이번엔 (관람객들이)한글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꼈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7일 오후 사천시 용현면 통양리, 동쪽으로 서택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 종포일반산단이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야트막이 자리 잡은 리미술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는 순원(筍園) 윤영미(46) 작가를 만나기 위해서다.

아담한 전시회장에는 윤 작가와 미술관 직원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일인데다 석양이 살짝 내려앉을 어중간한 시간이어선가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터뷰에 방해될까봐 다 보냈어요.”

그의 말에서는 특유의 유쾌함과 발랄함이 묻어났다. 이런 걸 ‘쿨 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인터뷰가 주는 어쩔 수 없는 중압감으로 이해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표현만은 경쾌하게 와 닿았다.

먼저 전시 작품들을 함께 둘러봤다. 유명한 글귀나 직접 쓴 글, 좋은 시, 노랫말이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사각의 글틀에 담겼다. 모두가 1호 사이즈라 했다. 그 중에서도 한눈에 쏙 들어오는 큰 글씨, ‘문자, 아름다운 메시지’가 마음을 끌었다.

“이건 처음 계획에 없던 거예요. 작품들이 너무 잘다 보니 힘도 없고 중심도 없는 것 같아서 개막 하루 전에 급히 썼죠. 이번 전시회의 주제라 해도 되고요. 글이나 문장은 내용을 풀어서 뭔가를 전달하지만 그에 비해 글자나 글씨는 그것 자체로 아름다움이나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하는 겁니다. 먹의 농도나 획의 굵기로 말이죠.”

윤 작가의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순간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도 떠올랐다. ‘눈앞에 글과 작품들이 있기 망정이지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 같은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단어의 뜻 그 이상을 글씨를 통해 보여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한글을 주로 쓴 이유는…”

그럼에도 한 가지 불쑥 떠오르는 궁금증, ‘미적 기교를 부리기는 한자가 더 낫다는데, 굳이 한글서예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하는 거다. 이에 대한 답이 또한 시원하고 거침없다.

“서실을 내려고 교육청을 방문했는데 담당직원이 하는 말이 ‘서실마다 몇 달을 못 넘긴다’는 거예요. 나중에 왜 그런가 살폈더니 제남(=고상준) 선생님의 영향력이 너무 크시더라고요. 한자로는 너무 대가셔서. 그래서 ‘나도 한자를 해선 안 되겠구나’ 하고는, 대신 한글 쓰기를 전파해보자 마음먹었죠.”

윤영미 작가는 1972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진주여고를 거쳐 대구계명대에서 서예를 공부했다. 그가 사천과 인연을 맺은 건 1999년 결혼을 하면서다. 그리고 그해 곧장 서실을 열었다. 벌리동에 있는 순원서예원이 그것이다. 그는 기존 서실들과 다른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한자보다는 한글의 매력을 더 알리려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길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지역에서 수 십 년 글을 쓰신 분들이 많은데 거기 비하면 저는 너무 어리잖아요. 밉보이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해서 조심조심 온 것 같아요. 그때 막연히 ‘마흔다섯 쯤 되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마침 지난해 첫 개인전을 열고 보니 제 나이가 마흔다섯 이었어요.”

그는 서실을 운영하면서 학업도 계속해 경기대 미술디자인대학원 전통예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중서화교류전, 청년작가전 등 국내외 전시에도 다수 참여하며 서예뿐 아니라 문인화나 전각 등 다양한 장르에서 실력을 뽐냈다.

올해 초부터는 지난해까지 말 많고 탈 많았던 사천문화재단의 이사로도 참여해 재단 거듭나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문화예술계가 워낙 예민한 곳이라 처음엔 이사 참여를 주저했죠. 하지만 욕을 먹어도 누군가는 나서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먹었어요. 재단이 제 역할을 하고 시민들로부터 사랑받으려면 더 분발해야겠지만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더 노출되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게 제 임무라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의 순원을 만든 힘은?

▲ 윤영미 작가의 한글서예작품.

이렇듯 윤 작가는 ‘메마르고 거칠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지역 문화예술계에 이제 제대로 발을 내디뎠다. 20년에 가까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른 뒤다. 젊은 새댁이 중견 문화예술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어려움이 어찌 없었겠는가. 그는 그 공을 남편에게 돌렸다.

윤영미 작가의 한글서예작품.

“지인들이 간혹 ‘그리 살아도 괜찮냐’고 걱정투로 묻곤 해요.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면 귀가 시간이 늦기 일쑤고, 아예 예술인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죠. 때론 서실에서 밤도 새우고. 그러니 주변에서 걱정이 됐나 봅니다. 그럼 전 웃으며 이렇게 말하죠. ‘우리 집 가훈이 각자 잘 살자 예요!’ 말은 이리 해도 남편 협조 없이 되겠습니까? 사실 무한 신뢰와 내조를 받고 있어요.”

윤 작가의 목소리는 여전히 경쾌했으나 표정은 조금 달랐다. 떳떳하고 당당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그 속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깔았다고나 할까. 그의 남편은 사천소방서에 근무하는 윤효식(47) 씨다. 고1인 아들(=준경) 하나를 두고 있다.

윤 작가는 스스로 “감성이 너무 풍부한 것 같다”고 말할 만큼 그의 예술작품의 근원에는 풍부한 감수성이 자리 잡은 듯 보였다.

“어떨 땐 내가 생각해도 너무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감정이 북받쳐요. 그럴 때 글을 짓거나 붓을 잡죠. 남이 볼 땐 대충 쓱쓱 빨리 하는 것 같을 텐데, 사실은 삭힌 감정이 순발력 있게 나타나는 거죠. 서력 30년의 내공이라고나 할까요?(웃음)”

윤영미 작가의 한글서예작품.

“삶도 예술도 잘 섞여야 좋은 결과”

그는 요즘 자신에게 변화의 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종이에 표현하던 것에서 돌에 새기는 쪽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전각은 대학원 시절 그의 논문 주제였을 만큼 애정이 깊은 분야다.

마침 함께할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경상대 미술교육과 박성식 교수와 연주자이자 수제기타 제조자인 문찬호 씨가 그들이다. 세 사람이 모두 사천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윤 작가는 이들과 함께 ‘종이‧돌‧나무 하모니展’을 기획하고 있다. 박 교수의 한국화와 윤 작가의 전각을 문 씨의 수제기타에 새겨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저는 삶도 예술도 잘 섞여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믿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면 ‘아, 이 분은 이런 색깔을 지녔으니 누구와 연결시켜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먼저 들죠. 그런데 이번엔 저와 어울리는 사람들을 제대로 만난 것 같아요.”

윤 작가는 이미 새로운 작품 구상에 흠뻑 젖은 듯 했다. 그의 색깔에 어울리는 좋은 사람들과 그 작품들은 오는 23일 사천시 남양동에 있는 ‘갤러리 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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