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병주가 만난 사람] ⑬ 부활호 설계자 이원복 씨

계기는 즉흥적…“훈련 겸 만들어보라”
넉 달 걸려 제작한 비행기에 직접 몸 실어
“사천이 전기비행기 만드는 본거지 되길”

 

부활호.

부활호. 1953년에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 비행기다. 이 부활호를 만든 곳이 공군기술학교다. 그리고 이 학교가 당시 사천비행장 안에 있었으니, 사천은 부활호의 고향인 셈이다. 오늘날 사천이 우리나라 항공산업의 메카임을 자부할 수 있음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됐다. 나아가 우리나라 항공 역사에 있어서도 부활호와 사천을 빼놓을 수 없고 떼어놓을 수 없게 됐다. 항공MRO 등으로 항공산업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2018년 사천. 그 출발에 즈음해 부활호의 최초 설계자 이원복(92) 씨를 만났다. 인터뷰는 그의 서울 자택 인근에서 1월 4일에 진행했다.

1926년생으로 아흔이 넘는 나이임에도 이원복 씨는 옛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왜 하필 그가 부활호를 설계하게 됐는지 궁금증부터 풀고 싶었는데, 그는 그 배경부터 설명했다.

“1950년 1월, 대학 졸업 무렵에 공군사관학교 부설 항공기술원양성소에서 문관으로 일을 시작했지. 항공 정비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는데, 곧 6·25가 터진 거야. 그 때 임관 신청을 했는데,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현역은 남쪽으로 가고 우리 같은 사람은 서울에 숨어 있었지. 서울이 수복되고 나서야 군이 (나를) 공군 소위로 현지 임관 해줬어. 그때부터 여의도비행장에서 비행기 수리 업무를 맡았어.”

그는 여의도비행장에서 정비 업무를 맡고 있다가 1952년 사천비행장에 공군기술학교가 생기면서 사천으로 옮겼다. 거기서 공군기술학교장 김성태 대령을 만난다.

“그때 나는 소령이었는데, 내가 서울대 공대에 강의 나가는 걸 알고는 김성태 대령이 ‘비행기를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어서 ‘만들 수 있다’고 답했지. 그랬더니 ‘교관·조교들 훈련도 겸해서 한 번 만들어보라’고 해서 시작한 일이야. 나는 나대로 비행기 설계를 해보고 싶던 차라 하기로 했지. 제일 우수한 경비행기를 만들어보고 싶었어.”

그러니까 그의 말대로라면 정부 차원의 대단한 임무 속에서 나온 부활호가 아니라 즉흥적 발상의 결과물인 셈이다. 그들이 나눈 이야기는 곧 구체화 됐다. 27명의 전담반이 구성된 것이다. 그때가 1953년 6월이다.

한국 최초 국산 비행기인 '부활호' 설계자 이원복 씨.

설계를 맡은 이 씨는 좀 특별한 모양을 만들고 싶었다. 특히 조종사가 육상 주행 시 전방 주시를 더 잘할 수 있도록 할 수 없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고안한 게 꼬리바퀴를 기체 가운데 쪽으로 가져오는 거였다.

“옛날 비행기들을 보면 꼬리 쪽에 낮은 바퀴가 달렸어. 나는 그 바퀴를 앞으로 당겼지. 가운데쯤으로. 그러니 비행기 뒷부분이 상당히 들리게 돼. 자연히 조종사들의 시야가 넓어지지. 플랩도 달았어. 원래 작은 비행기에는 잘 없는 건데, 여기에는 넣었지, 그러니까 낮은 속도로도 날아오를 수 있고 착륙도 가능하지.”

플랩(flab)은 비행기의 양력을 일시적으로 높여주는 장치다. 그는 조종사 뒷좌석에 쪽문을 만들어 촬영도 가능하도록 했음을 알려주며 “그땐 나름 최신 비행기였다”고 강조했다.
부활호에 들어간 각종 부품은 수리용 기자재를 활용했다. 그러니 설계도 기존 부품이나 장비에 맞춰야 했다.

“그땐 수리용 기자재가 많았거든. 그래서 그냥 있는 것 같고 다 한 거야. 엔진도, 계기도, 타이어도. 따로 한 건 날개, 동체, 바퀴 정도지. 설계를 하면서 동시에 조립을 했으니까 시간도 얼마 안 걸렸지. 한 4개월 정도. 대학 다닐 때 무동력 글라이더도 만들어봤고, 비행기 정비도 쭉 해왔으니까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어. 오히려 흥미가 있다 보니 밤잠 안자고 했던 것 같아.”

국산비행기 1호, 부활호는 그렇게 태어났다. 개발 시작 4개월여 만인 10월 10일이었다. 이튿날 초도비행에는 이 씨가 직접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 민영락 소령이 조종을 맡았지만 처음 만든 비행기에 대한 불안감이 있을까 싶어 함께 탄 것이다.

“비행기는 과학의 산물이야. 나는 그 비행기가 하늘을 잘 날 거라고 믿었거든. 그래서 비행기에 탔지. 친구도 안심시킬 겸. 그날 사천 상공을 한 시간 반 이상 날아다녔던 것 같아. 기분이 최고였지.”

국내 최초 국산비행기가 초도비행에 성공하자 공군 관계자들의 시승이 이어지는 등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결국 이듬해인 1954년 4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대한민국의 부활’이란 뜻으로 復活(부활)이란 이름을 지어 명명식을 가졌다. 그를 비롯한 부활호 제작자들에겐 화랑무공훈장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렇듯 국가적 관심을 끌었던 부활호가 실종되는 일이 발생한다. 1960년, 공군은 김해기지에 있던 부활호를 한국항공대학으로 보냈다. 폐기처분하기보다 학생들에게 제작실습용으로 쓰이길 바랐던 것이다. 이후 대구에 있던 한국항공대학은 1966년 2월에 문을 닫았고, 같은 해 이원복 씨도 대령으로 전역했다. 이후 부활호에 대한 관심은 끊겼다.

“어느 때부턴가 부활호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어. 그러다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 성공 100주년이던 2003년에 어느 신문기자가 찾아왔어. 한국 항공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게 없느냐고 묻길래 부활호 얘길 해줬지.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는 얘기도. 그랬더니 그 기자가 ‘부활호를 찾는다’는 기사를 썼고, 그 기사를 보고 연락이 온 거야.”

부활호는 2004년 1월 13일 경상공업고등학교 제도실 건물 지하창고에서 발견된다. 알고 보니 경상공고는 폐교된 한국항공대학 자리에 1967년 들어섰고, 부활호는 그때부터 그 자리에 계속 있었던 것이다. 뼈대뿐이었던 부활호는 그해 공군이 새롭게 복원해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2008년엔 등록문화재 411호로 지정도 됐다.

이후 경남도와 사천시는 부활호의 또 다른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원형 복원이 아닌 성능개량 복원인 셈이다. 개량복원 부활호 2대 중 1대는 한국항공우주산업㈜ 부설 항공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고, 다른 1대는 지금도 항공우주엑스포 때마다 하늘을 날며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부활호의 역사를 상세히 소개한 이원복 씨는 인터뷰 말미에 사천의 항공산업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 기술로 경비행기는 충분히 만들 수 있으니까 전기비행기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 기름 안 쓰는 배터리 비행기. 우리나라 배터리 기술이 또 좋잖아? 전기자동차도 많이 만들고 있으니까 전기비행기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사천이 전기비행기 만드는 본거지가 되면 얼마나 좋아. 수출도 잘 될 것 같은데,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 부활호도 전기비행기로 개량복원 해보고 싶은 게 지금 마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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