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삼조 시인.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에 이어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들린다. 옛날에는 기적적으로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었는데 요즘은 한낱 개천에서 용이 날 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가진 자만이 가진 자식을 키울 수 있고 권력도 거기에 따라 간다는 말일 듯하다. 거기에 이어 나온 말이 금수저 은수저 하는 수저 타령인가.

하지만 개천과 용의 관계를 다른 입장에서 곰곰이 따져 보면 개천에서는 용이 나지 않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개천의 크기는 동네 어귀를 흘러가는 작은 물줄기다. 큰 용이 날만한 곳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용이 되기 전 단계라는 이무기도 웅크리고 있지 못할 곳이다. 단지 장차의 용이 태어난 고향은 된다. 용이 되는 것은 더 넓은 강이나 바다로 갔을 때의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개천 자체는 용이 날만한 곳이 원래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굳이 용이 나기 불가능한 개천과 저 큰 인재를 상징하는 용을 결부시킨 까닭은 무엇인가. 불평등한 세상을 극복하고 평등한 세상을 염원하고자하는 마음이 있어서이지 않았을까. 꼭 내 자식이 아니라도 이 좁고 고통스런 울타리를 벗어나 넓고 큰 세상에서 마음껏 뜻을 펼치는 저 출세한 ‘용’의 존재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정작 ‘용’이란 무엇인가.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사해의 물을 다스려 온 생령을 살아가게 하는 존재인가. 그도 아니면 막강한 권력으로 만인의 위에 군림하여 뭇 생령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거머쥔 존재인가. 만인이 누릴만한 큰 재물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허공에 쌓고 또 쌓은 존재인가. 다 아닐 것이다. 그런 용이라면 어떤 세상에서든 필요치 않다.

그리고 세상은 바뀌었다. 누구든지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얼마간만 연마한다면 세상을 살아갈 지식을 비교적 공평히 쌓아갈 수 있다. 마음을 돈독히 가지고 눈을 조금만 부릅뜬다면 세상을 헤쳐 갈 지혜를 터득할 수도 있다. 세상은 밝아졌다. 굳이 하늘의 용이 조화를 부리지 않아도 세상은 제 갈 길로 간다.

그러니 사람이 문제다. 당연히 금수저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따로 있고, 온갖 우여곡절로 모든 사람의 형편이 같지는 않아도 노력의 여하에 따라 그 환경을 개선해갈 여지는 분명히 있다. 조급해 하지 않고 성급히 분노하지 않는다면, 평등을 기반으로 하고자하는 세상에서 나의 권리를 지켜나갈 그 ‘눈’을 바로 뜨고 있다면, 엉뚱한 가짜뉴스에 휘둘리는 어리석음을 물리친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절망의 늪에 빠져 자기를 갉아먹지만 않는다면, 자기를 스스로 높이려고 한다면.

지금은 죄지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용’이다. 그리고 그 용들이 더불어 세상을 다스리는 시절이 왔다. 모든 개천에서는 이미 용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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