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의 배우며 가르치며]

▲ 송창섭 시인.

해질 무렵 플로리다 키웨스트(Florida, Key West)로 가기 위해 마이애미 해변을 떠났습니다. 땅거미가 누리를 덮으면서 이내 사방이 어두워지고 가로등, 차량 전조등, 건물이 토하는 불빛이 도심지를 가득 메웠습니다. 관광 휴양지임에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요란하거나 들뜨지 않은 분위기가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거리를 오가거나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시민들의 표정은 오히려 차분하고 담담했습니다.
 
흔들거리는 차창을 바라보며 달리다가 만난 길은 1번 도로였습니다. 1번 도로의 끝에는 키웨스트가 있고, 이곳은 미국 북녘을 향하는 시작점이요 대서양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이 땅을 지배하면서 새로운 주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길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상의 영토로부터 쫓겨난 원주민, 인디언들의 심정은 사뭇 다르겠지요. 아픈 과거사는 지역, 시대, 인종을 초월하여 언제나 그렇듯 마음을 착잡하게 만듭니다.
 
짙은 어둠에 몰려 허우적대는 길손처럼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전쟁 영화의 ‘돌격 앞으로!’ 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몇 개의 다리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하늘엔 무척 많은 별들이 또렷한 눈망울을 드러내며 갯내음 실은 바람의 어깨를 다독이고 있습니다. 바다도 하늘도 점점이 박힌 우주의 생명체들도 평온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모든 상념을 내려놓고 홀연 자유를 찾아 나선다 해도 누구 하나 탓할 수 없는 아늑하고 푸근한 밤입니다. 생멸(生滅)의 조화가 공존하는 시간, 어떤 사랑을 해도 좋고 어떤 이별을 해도 아깝지 않은 밤입니다. 때문에 슬픈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슬픔이 얽혀있는 아이러니컬한 밤이기도 하지요.
 
두 시간 반의 질주 끝에 도착한 곳은 마라톤시였습니다. 마라톤이라, 묘한 전율이 온몸을 뒤덮습니다. 텍사스의 빅밴드국립공원 길목에도 마라톤시가 있는데 이곳에도 42.195의 대명사가 있다니, 질긴 인연에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 먼 바다 선상 낚시와 보트 놀이, 스쿠버 다이빙, 패러세일링으로 유명세를 탄 섬이지만, 이슥한 시각이기에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새벽 여섯 시, 바깥은 아직도 미명의 세계였습니다. 지나칠 방앗간이 없는 참새 신세라 할지라도 그냥 가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반바지 반소매 차림으로 길 위로 몸을 밀었습니다. 이마를 때리며 가슴에 부대끼는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고 싱그럽습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다리를 저었습니다. 해 뜨는 동쪽을 향하면 바다도 나오겠지요.

달리다 보니 길 건너편의 색다른 건물 두 채가 눈에 뜨입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마라톤중고등학교였습니다. 이름이 그러할 뿐 마라톤 선수를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교육기관은 아닙니다. 다만 학교명 아래 적힌 ‘돌고래의 집(Home of The Dolphins)’이란 글귀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한 시간 남짓 달리니 바다가 나왔습니다. 망망대해를 찬란한 물감으로 도배하듯 해가 서서히 끓으며 떠올랐습니다. 바닷물에 빛 들이기였습니다. 구름과 어우러져 멋들어진 영상을 연출했습니다. 자연이 펼치는 예술적 기교를 두고 성(聖)스럽다는 말이 어울리기나 할런지요. 인간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그 무엇과 견줄 수 있을지 줄곧 탄성만 쏟았습니다.

빵과 달걀, 우유와 과일로 아침을 해결하고 마라톤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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