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삼조 시인.

부처님오신날 아침, 느지막이 TV를 켜니 마침 봉축법요식 중계가 한창이다. 그 중심이랄 수 있는 조계종 총무원장 봉축사는 화합과 평화를 강조한 것 같은데, 그 중 ‘사부대중은 천칠백 년 동안 같은 배를 타고 함께 노를 저어 고해(苦海)를 건넜다’는 대목에 특히 마음이 쏠렸다. ‘사부대중’은 모든 불교신도를 총칭하는 말일 듯하고, 천칠백 년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의 기간일 듯하다. ‘고해’는 고통의 바다라는 말인데 번뇌가 가득한 세상을 상징한 말이겠고, 그 바다를 함께 노 저어 건너간다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해 고통이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다는 뜻일 것 같다. 

꼭 불교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지향해야 할 일을 대략 가리킨 말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한용운 선사의 시 ‘나룻배와 행인’이 연상된다. 그 시에도 고해를 건너는 데에 대한 각별한 당부와 다짐을 담는 말씀이 담겼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시라 다 아시리라 짐작하지만 기억을 되살려 보자는 뜻에서 전문을 소개해 본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를 벗어나 고통이 없는 경지로 드는 것을 흔히 물을 건너 ‘저편 언덕’에 도달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안다. 위 시도 나룻배가 행인을 싣고 물을 건너는 역할을 하는 일을 그렸다. 행인은 물을 건너는 것이 목적이므로 나룻배의 수고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나 나룻배는 행인이 물을 건너도록 궂은 날씨라도 쉬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룻배는 건너게 해 주어야 할 새로운 사람을 항상 기다리고 있다. 나룻배는 행인을 위해 어떤 고생도 감수하며 낡아 가는 희생적 존재다. 그리고 이 시에서의 ‘당신’ 또는 ‘행인’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 수없이 많이 있는 사람 중의 일부 또는 한 사람이리라. 그 중 어떤 사람이면 어떠랴.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의 노고로 그 사람이 편안함을 얻는다면 ‘나’ 곧 ‘나룻배’의 역할은 충족된 것이다. 

위 시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발표된 시집 「님의 침묵(沈默)」에 수록되었다. 그 당시의 엄혹한 현실에서 벗어날 길은 우리 겨레 모두가 ‘나룻배’가 되는 자세로 겨레와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하리라고 한용운 선사는 위 시를 쓴 것일 게다. 

‘나룻배와 행인’이 발표된 지 100년이 가까이 된다. 그동안 세상은 크게 달라졌지만 사람답게 처신해야 할 일은 큰 변함이 없을 듯하다. 저마다 내가 세상을 위해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이 시와 함께 곱씹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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