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법 제36조는 혼인과 가족생활, 모성보호와 국민보건을 규정하고 있다. 민법은 근친혼으로 8촌 이내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혈족, 배우자 혈족의 배우자와의 혼인을 금지하고 있다. 겹사돈은 가능하지만 형수와 시동생, 처제와 형부, 처남댁과 올케남편 간의 혼인은 금지된다. 그런데, 불과 약 20년 전에는 이에 더하여 촌수와 관계없이 동성동본 간의 혼인도 금지되었다. 동성동본 부부에게는 혼인신고 자체가 수리되지 않았고, 그 사이에 태어난 자녀의 취학 등을 위해 한시법인 ‘혼인에 관한 특례법’을 통해 그 자녀를 호적에 올릴 수가 있었을 뿐이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동시에 폐지되었지만, 압록강을 건너온 동성동본불혼의 유교적 ‘전통’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 수립되고도 약 50년을 지속해오다가 1997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결정(9인의 재판관 중 5인이 단순위헌의견을, 2인이 헌법불합치의견)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농경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을 근본이념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전환되었다.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은 자기운명결정권을 전제하고 있고, 여기에는 성적자기결정권 특히 혼인의 자유에 있어서 상대방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사회질서나 공공복리를 위한 자유의 제한은 가능하지만, 동성동본불혼 조항을 통해 유지해야할 농경적 사회질서나 신분제적 공공복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금혼의 범위를 남계혈족에만 한정하는 것 역시 가부장적 농경사회의 산물로서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도 반한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일까. 삼국시대는 왕족이나 귀족 중 일부만이 성을 가질 수 있었고,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에게 왕이 성씨를 하사하는 경우가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황산벌의 계백장군은 성이 계씨가 아니다. 이름이 계백일 뿐이다. 평민이 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중‧후반부터이고, 조선시대 초기에 양반층에 속하는 사람은 인구의 3%에 불과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의 성의 대부분은 조선말에 각자가 ‘모시던’ 양반의 성을 따라서 혹은 각자의 기호에 따라 선택한 것의 결과일 뿐이다. 또한 지금 우리 민법은 부모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법원의 허가를 얻어 성과 본을 창설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할진대, 문명사회에서 성씨가 같다고 법률혼을 금지하는 것이 해방 이후 50년이나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돌이켜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혈액형으로 성격을 가늠하는 일 만큼이나 비과학적이라고 생각되는, 강 씨는 어떻고 최 씨는 어떻다고 믿는 사람이 아직도 다수 존재하는 21세기 IT강국 코리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