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 인생 30년 도청 김홍배.. “사천 도예가협회 만드는 게 꿈”

지난 10월9일, 경남 사천에서 활동하는 도예가 도청 김홍배 선생이 전통가마에 불을 지폈다. 그는 지역 도예인들의 모임이 활발하게 이뤄져 사천도자기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길 희망했다.
우리나라에서 도자기로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어디가 있을까? 경기도 이천 여주 광주, 그리고 전남 강진 정도를 떠올리는 이가 많을 성 싶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곳 사천도 도자기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당시에 수많은 사천의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그곳에 우수한 도예기술을 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인들이 국보로 아끼는 이도다완. 그 이도다완의 고향으로 주목 받는 곳 중의 한 곳도 바로 사천이다.

그럼에도 사천의 도예 현실은 녹녹치 않다. 비록 10여 명의 도예가들이 활동하고 있으나 명성이나 규모면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하다 보니 사천을 ‘도자기의 도시’라 부르기에는 한참 부족한 느낌이다.

이런 아쉬운 마음을 가졌던 중에 반가운 소식 하나가 들렸다. 한 도예가가 전통 가마에 불을 지핀다는 소식이었다. 가마에 불 지피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데다 그 도예가의 삶도 궁금하던 터라 한 걸음에 달려갔다.

사천읍에서 곤양으로 향하는 1002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곤양면 흥사리로 살짝 빠지면 도예가 김홍배(51) 씨의 집이자 작업장인 ‘도청도예’가 나온다. 도청(陶淸)은 그의 호이다.

도청 선생이 가마에 불을 피운 것은 지난 9일 오전9시. 그에 앞서 간단한 의식을 가졌다.

“도예는 기술로만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마음이 중요하죠.” 그는 짧은 말을 남기고는, 흙과 불을 다스리는 그 누군가를 향해 술을 따르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가마 봉통에 조용히 불을 지폈다.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에 있는 도청도예. 가마 땔감용 장작이 수북이 쌓여 있다.

도청 선생이 가마에 불을 지피기 전에 간단히 예를 취하고 있다.
불쏘시개에 불이 붙자 봉통은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불은 하루가 넘게 타오르면서 1300도 가까운 열기를 가마 네 칸에 골고루 나눠줄 것이었다.

이날 밤, 가마엔 장작불이 여전히 뜨거운 가운데 도청 선생의 지인과 지역 예술인 몇몇이 도청도예에 모였다. 좋은 작품이 나오기를 함께 빌어주고, 또 그의 도예인생 30년을 회고하고 격려해주기 위한 자리였다.

그가 도예를 시작한 것은 1980년 무렵이다. 경기도 광주가 고향인 그는, 집 근처에 있던 서울대 권순형 교수의 도예연구실에 들렀다가 물레를 발로 차며 흙을 빚어 올리는 모습에 반해 버렸다.

“그건 예술을 넘어 요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지요. 그렇게 넋을 잃고 구경에 빠져 있는데, 권순형 교수가 그런 나를 보고는 ‘자네도 한 번 해보지’ 하고 권한 것이 인연이 돼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렇게 권 교수의 연구실에서 도예 공부를 시작한 도청 선생은 이후 이천으로 옮겨 청자를 연구했다. 그러던 중 1987년, 당시 진주 대아고등학교의 재단 이사장이던 아인 박종환 씨와 인연을 맺어 진주로 내려왔고, 막사발 연구에 몰입했다.

그러나 아인 선생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고, 5년 뒤 그는 독립했다. 그런데 그가 홀로서기를 시도한 곳은 고향인 광주나 이천이 아니라 사천이었다. 고급스런 청자나 백자보다 소박함이 돋보이는 막사발에 매력을 더 느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사천에 눌러 앉은 것이 17년이다. 자리를 잡기까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때마다 가족들이 큰 힘이 됐다고 한다. 그는 아내 김창숙 씨 사이에 두 아들을 뒀고, 큰 아들은 그 새 20대로 장성했다. 경제적으로 썩 넉넉하지 못해 가족들에게 늘 미안하지만 그의 실력과 인품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게 보람이다.

그리고 이제는 “고향보다 사천이 더 편하다”고 할 만큼 사천사람이 다 됐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날 모인 그의 지인들은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며 장작불을 함께 지켰다.

전통 가마에 불을 때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라고 한다. 불기운과 싸워 이겨야 하고 또 시간과의 싸움에서도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단다.

긴 인내의 시간을 그의 지인들이 함께 했다.
불은 다음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꺼졌다. 불 때기가 30시간 가까이 지속된 셈이다. 그리고 다시 식히기를 사흘째. 13일 오후가 돼서야 막았던 아궁이 입구를 뜯었다.

‘작품이 잘 나왔을까?’ 이런 생각으로 도청 선생의 표정을 살펴보지만 알 길이 없다. 표정변화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참을 기다리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선생님, 작품이 잘 나온 것 같습니까?”

“뭐, 그럭저럭... ” “열기가 골고루 안 퍼졌네요. 가운데는 괜찮은데, 바깥쪽 온도가 낮아서.. 유약이 채 녹지 않은 데도 보이고...” “이걸 요변이라 하는 건데, 기가 막히게 잘 나온 겁니다. 딱 이 부분만 빼면... 하하..”

그의 말에는 어느 정도의 만족감과 아쉬움이 적당히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도예에 있어 완전 ‘초보’인 기자의 이어지는 질문에 짜증도 날 법 하건만, 그는 이런 저런 설명을 자세히 덧붙였다. 예술가들에게 흔히 따라다니는 ‘자존심’이나 ‘신비감’ 따위의 단어와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어떤 숨김도 꾸밈도 없는 듯 느껴졌다.

“전통 가마의 ‘맛’이라면 불이 만들어 내는 ‘알 수 없는 변화’죠. 이를 요변이라 부르는데, 가스 가마에서는 보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가스 가마에는 타고 남은 재가 없고 온도도 너무 일정하거든요.”

가스 가마가 성공률 90%대를 보이는 반면에 전통 가마는 30~40%로 매우 낮단다. 또 가스 가마에 비하면 전통 가마는 불을 계속 살펴야 하니 힘도 무척 든다. 그렇게 불기운에 녹초가 되기 일쑤지만, 그래도 장작불이 만들어내는 멋 때문에 그는 1년에 두 세 번은 전통 가마에 불을 붙인다고 한다.

불은 30시간을 타올랐다. 그리고 열기를 식히는 시간을 거쳐 13일에야 막았던 가마 입구가 열렸다.

가마 속에 들어가 작품을 살펴보는 도청 김홍배 선생.

갓 태어난 도자기들을 조심스레 매만지는 그에게 조금은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사천의 도자기도 다른 지자체의 이름난 도자기들처럼 브랜드화 할 수는 없을까 하는 거였다. 그는 도자기를 만지는 것보다 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있는데, 지역 도예가 협회를 구성하는 일입니다. 협회를 구성해 사천 도예의 특징과 그 우수성을 잘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저마다 색깔이 강해 독자 행보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누군가 나서서 일을 도모하면 사천사발이 더 꽃 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청 선생은 앞으로 자신이 나서서라도 지역 도예인들을 하나로 묶는 데 힘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사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 도예인은 10여 명이다. 그리고 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역 도예인 끼리는 교류가 부족한 편이다. 이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이도다완의 옛 가마터가 어디냐’ 등 역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더라도 이제는 도예인들이 묵은 갈등을 풀었으면 하는 게 주변의 바람이다. 1300도라는 가장 뜨거운 공간에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가 도예가 아니던가. 유약과 흙을 녹이듯 갈등을 녹여 내는 도예인들의 열정과 지혜가 보고 싶은 게 사실이다.

상상해보자. ‘사천’이란 이름을 단 도자기가 전국은 물론 세계에서 주목 받는 그런 날을!

갓 구워낸 도자기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도청. 그는 사천의 도예가들이 마음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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