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의 배우며 가르치며]

▲ 송창섭 시인.

지문(指紋 손가락무늬)이란 손가락 안쪽의 끝에 있는 살갗의 무늬 또는 그것을 찍은 흔적을 가리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며 일평생 변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물론 간혹 정보 매개체를 통해서 지문이 찍히지 않는다,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이는 지문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닳은 결과이지 본디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이런 불변의 모양 때문에 고대 바빌론 시대 때부터 신분 증명의 징표로 쓰였던 것이지요. 현대 사회에서도 본인 확인과 범죄 수사에서 범인을 찾는 중요한 단서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지문의 생김새는 고리 모양이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소용돌이 모양, 활 모양 순으로 나타납니다. 지문을 일러 자연을 닮은 손의 무늬라 할 수 있겠지요. 손금과 마찬가지로 지문도 개인별로 유일하고 불변하기 때문에, 의학계에서는 이를 통해 그 사람의 유전적 생체 구조를 밝히고 선천성 호르몬의 이상을 진단하는 자료로 쓰고 있습니다.  

다시 손 이야기로 돌아가서 손에 관한 못다 한 사연을 끄집어낼까 합니다.

“손에 장을 지지겠다,” 심심찮게 듣기에 결코 낯설지 않은 말이지요. 고통을 담보로 하여 어떤 일을 확신해서 큰소리치며 장담할 때 씁니다. 손을 뚝배기에 비유해서 뚝배기 즉 손바닥에 된장국물을 담고 뜨거운 불에 지진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주장이 틀림없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인데 생각해 보면 몸서리칠 정도로 잔인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손’ 대신에 ‘손가락/손톱/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는 표현도 혼용하고 있습니다. 손가락/손톱/손바닥을 끓는 장(간장물)에 담근다는 뜻으로 풀이하는데, 다소 이견은 있겠지만 비유가 주는 끔찍함은 하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지다’는 말은 ‘불에 달군 물체를 사람 몸이나 다른 물체에 대어 뜨겁게 하거나 눋게 하다, 국물을 조금 붓고 끓여 익히다, 불에 달군 판에 기름을 바르고 전 따위를 부쳐 익히다, 뜨거운 곳에 대어 찜질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혹하리만치 지나친 표현은 공포감을 주고 몸서리치게 합니다. 실현 가능성이 낮거나 없어 보이는 호언장담은 자제할 필요가 있겠지요.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손을 가리켜 ‘눈에 보이는 뇌의 일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표현이 지나치지 않은 것은, 앞발을 땅을 딛고 걷거나 뛰는 데에 사용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뒷발만을 의지하여 활동하는 직립 보행을 함으로써, 인류는 크게 진화하는 초석을 다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이 손에 베푼 자유로움과 손을 활용한 자유로움은, 인간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로 변화시켰고, 오늘날 아이티IT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과 인간의 인지 혁명으로부터 데이터교를 숭배하는 신흥 기술 종교의 등장까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미래를 예측하는 호모 데우스(Homo Deus 인간신, 신이 된 인간)의 경지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논조의 지나친 확산을 조율하면서 다시 ‘작지만 위대한 손’의 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인간의 좌뇌는 수리력, 기억력, 어휘력, 논리력의 지적 능력을 관장하는 기능을 가졌기에 디지털 뇌라 이르며 오른손 발달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우뇌는 직관력, 창조력, 예술성, 연상력의 감성적 능력을 담당하여 아날로그 뇌라 이르며 왼손의 발달과 연관을 지어 말합니다. 손을 뇌에 견주는 까닭을 헤아릴 수 있는 장면이지요. 그렇다면 구태여 좌뇌의 우월성 혹은 우뇌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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