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왜구 노략질 심할 때 4100명이 뜻 모아 ‘매향’
미륵신앙이 배경···‘이 모진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매향비 위치, 간척 전까진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던 갯벌
향촌동에도 ‘매향암각’···문화콘텐츠 개발로 이어질지 관심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천인(千人)과 한마음으로 발원하여 침향목(沈香木)을 묻고 미륵불이 하생(下生)한 후 베풀어지는 용화삼회(龍華三會)에 이 침향으로 봉헌공양하기를 원하오며...”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에 있는 보물 제614호 ‘사천흥사매향비’.(사진=사천시)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에 있는 보물 제614호 ‘사천흥사매향비’.(사진=사천시)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에 있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614호 ‘사천흥사매향비’에 새겨진 글의 일부를 해석한 내용이다. 600여 년 전 그 옛날, 이 땅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삶이 얼마나 팍팍하고 힘들었기에 굵은 나무를 베어 갯벌에 묻고는 고통 없는 세상으로 구원받아 가길 바랐을까.

최근 곤명면 성방리에서 이탄층에 묻혀 오랫동안 썩지 않은 나무 몸통이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목질이 온통 검은빛으로 변한 이 나무가 행여 매향(埋香) 의식과 관련이 있는 침향목이 아닐까 하는 기대 섞인 추측이 나오면서 세간의 관심을 더욱 불러일으킨 셈이다.

이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사천시가 문화재청에 관련 내용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하니 그 결과를 차분히 지켜보면 곧 알게 될 일이다. 다만 이 대목에서 곱씹어 볼 일은 사천시가 지닌 매향의 역사와 문화다. 이는 단지 문화재에 대한 이해를 넘어 이 땅에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정신을 공유하는 일로서 매우 뜻 깊다고 하겠다.

사천흥사매향비는 고려 말기인 1387년(우왕 13년)에 사천을 비롯한 서부경남 일대 승려와 민중 4100명이 매향의례를 하고선 그 기록을 남긴 것이다. 현재 전국에 전하는 매향비 사례는 14건인데, 그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고 한다. 하지만 꼭 보존 상태가 좋다고 하여 ‘보물’로 지정될 수는 없을 터, 비문이 담고 있는 내용에도 특별함이 있기 때문일 테다. 그 특별함에 관해선 이해준 공주대 명예교수의 시선을 참고하자. 이 교수는 지난해 9월 곤양면행정복지센터에서 있었던 ‘사천시 서부권역 문화관광콘텐츠 개발 학술연구용역 중간보고회 겸 학술세미나’에서 발제를 맡았던 학자다.

그가 당시 주목한 사천흥사매향비의 가치와 성격은 크게 두 가지다. 그 첫째는 역시 ‘완전한 모습’이다. 현전하는 매향비 중 네 번째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인데 비해 보존 상태가 무척 양호하단 얘기다. 다른 매향비들이 투박한 글씨로 간략히 새겨졌다면, 흥사리 매향비는 14행 204자의 글자가 빼곡하다. 그 내용에 관해선 뒤에서 살피기로 한다.

둘째는 발원자의 수가 4100명으로 가장 많다는 점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조선 초기 사천현의 인구는 1817명이다. 고성현은 2885명, 곤남현(곤양과 남해 일대)은 1300명으로 기록돼 있다. 물론 공식적으로 파악되고 있던 호구대장에 따른 수치이겠으나, 어쨌든 매향의식에 4100명이 모였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 일대에서 사람이 모여 들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때 그 사람들은 이렇듯 지극정성으로 모여 무엇을 빌었던 것일까? 그리고 매향이란 의식은 어떤 걸까?

고려 말기는 잘 알려진 것처럼 한 왕조가 저물 때라 사회가 무척 혼란스러웠다. 민중의 삶도 피폐할 때다. 특히 남쪽 바닷가로는 왜구의 노략질도 끊이질 않았던 시기다. 이 교수의 발제문에 따르면, 1358년(공민왕 7년) 3월에 왜구가 각산성을 침략해 어선과 병선 300여 척을 불태운 것을 비롯해, 1360년부터 1390년까지 왜구의 침략은 계속됐다. 사천흥사매향비는 이런 극도의 혼란기에 태어난 셈이다. 바로 매향이란 의식을 통해서.

매향(埋香)이란 글자를 그대로 풀면 ‘향나무를 묻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미륵하생경(불교 경전)에 근거한 일종의 신앙(=미륵신앙)이다. 즉 미륵불이 하생하여 주관하는 용화법회에 침향을 공양으로 준비해 참여함으로써 미륵과 함께 내원궁(=미륵보살이 사는 곳)에 들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담겼다. 결국 이 소원의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침향이다. 당시 사람들은 향나무를 묻고 수백 년이 지나면 침향이 되고, 침향이 된 뒤에는 바다에서 용이 솟아오르듯 스스로 물위로 떠오른다고 믿었다.

이때 향나무를 묻는 곳은 계곡 물(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의 갯벌이었다. 흥사리 매향비가 지금의 위치에 자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은 작은 하천만 지날 뿐 갯벌은 보이지 않지만, 간척사업이 이뤄진 191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올라왔던 곳이다.

이쯤에서 사천흥사매향비에 담긴 내용을 살펴보자. 비문의 시작은 이렇다. 천인결계매향원왕문(千人結契埋香願王文). “천인이 계를 맺어 매향하며 원을 세우는 글”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인은 ‘1000명의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으로 봄이 타당한데, 비문 뒷부분에서 “4100명이 함께했다”고 적어 놓았다.

이 글 첫머리에 소개한 대목에서 이어지는 부분은 이렇다. “미륵여래님의 청정한 법문을 듣고 무생인을 깨우쳐, 불퇴지를 이루고자 합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발원하는 것은 생이 다하면 내원에 태어나고 불퇴지를 얻기를 바랍니다. 미륵님께서 오시는 날 목숨을 이 나라에 맡길 것을 기약하며, 용화삼회의 초회에 참가해 법을 듣고 도를 깨달아 일체를 갖추어 정각을 이루게 되기를 서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퇴지’는 ‘수행 과정에서 이미 얻은 공덕을 잃거나 물러서는 일이 없는 지위’를 뜻한다.

경남도유형문화재 제288호 삼천포 향촌동 매향암각.(사진=사천시)
경남도유형문화재 제288호 삼천포 향촌동 매향암각.(사진=사천시)

한편, 사천시에는 흥사리 매향비 말고도 매향 관련 문화재가 또 하나 있다. 경남도유형문화재 제288호로 지정된 삼천포 향촌동 매향암각이다. 향촌동 뒷산(향포산) 중턱에 있는 이 암각엔 ‘1418년(조선 태종 18년)에 승려와 신도들이 수륙무차대회를 개최하고 향을 묻었다’는 기록이 담겨 있다. 수륙무차대회란 바다와 육지에 떠도는 영혼을 달래기 위해 올리는 제사다. 바위 크기는 가로 6.3m, 세로 4.3m이고, 23행 174자로 구성돼 있다. 이곳 역시 봉남천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다.

이렇듯 사천엔 ‘매향’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이를 “문화콘텐츠화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어떤 결실이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번 일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살피는 기회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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