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조 시인.
정삼조 시인.

뉘엿뉘엿 한 해가 저물더니 새해 들자 한파가 닥쳤다. 언뜻 들으니 몇십 년 만의 추위라 하는데, 과연 얼음이 근래 보기 드물게 두껍게 얼었다. 우리 사는 남도에서 이런 얼음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난다.

나무장이란 게 열렸던 때가 있었다. 장날이면 물목마다 장이 따로 서는데 그 당시 생활필수품이었던 땔감을 팔고 사는 시장이었다. 장작은 비쌌기에 서민용으로 솔잎을 사람 키와 비슷한 크기로 뭉친 것도 시장에 나왔다. 그것을 판 여성들이 그 무섭게 무거운 것을 머리에 이고 산 사람의 집에까지 운반해 주곤 했다. 지금 사람들 같으면 아마 목뼈에 큰 무리가 가지 않을까 싶은 정도였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위해 그 고생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가라고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그 땔감으로 밥을 짓고 방을 데우던 사람들은 또 어땠던가. 밥 지을 때 잠깐의 그 온기로 추운 겨울밤을 온전히 견뎠던 사람들은.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추위에 견딜 장사도 없었기에 산이 온통 벌거숭이로 변했다. 그 당시 도시 근교 산은 푸른 산이 드물었다. 60년대 중반 무렵에야 연탄이 보급되어 그 나무장도 사라지고, 이어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또 무서운 때가 있었다. 이어 석유가 등장하더니 이제는 전기와 가스가 우리 방을 덥히게 되었다. 산도 자연히 푸르게 되었다. 

당시의 옷은 어땠던가. 가난한 사람들은 솜바지 저고리가 최고의 방한복이었다가 봄, 여름이면 솜을 뺀 그 옷을 입었다. 결국 사철 옷이 한 벌인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닳아진 곳을 누덕누덕 기워 입을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그 고생 속에서도 집집마다 아이들은 넘쳐났다. 그때 태어나 이른바 베이비부머라 불릴 수 있는 연령층의 사람들은 그 추위와 배고픔을 건너 지금의 노년층이 되었다. 그 사람들에게 바칠 시 한 편이 생각난다. 정지용 시인의 「장수산 1」이다.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 이를테면  장기에 여섯 번 지고도 아무렇지 않을 스님이 있을 법한 산속의 정적 같은 겨울을 그림처럼 그린 시다. 추위로 대변되는 시련을 마음으로 가라앉히는 시다. 한 연의 산문시로 되었다.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長壽山)속 겨울 한밤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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