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속 우리 문화 톺아보기>⑤백제여인과 50대 천황 간무

간무왕을 제사 지내기 위해 지은 으리으리한 헤이안 신궁과 그를 기념하려고 마련한 지다이마츠리(時代祭)의 화려한 축제를 뒤로하고 우리 일행이 찾아간 곳은 간무왕 어머니 고야신립(高野新笠, 타카노노니이가사)이 잠들어 있는 대지무덤(大枝陵, 오오에료)이었다.
 
교토 서부지역 구츠카케 산기슭에 있는 백제 여인 고야신립의 무덤을 찾아가던 날은 늦가을 햇살이 감나무 가지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교토시관광협회 발행 안내책자에도 나와 있지 않은 무덤을 가츠라역 구내 여행 안내소에 들려 찾아달라고 하니 담당 직원은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다본다. 한참만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인터넷 지도정보 사이트를 뒤적이더니 겨우 무덤의 번지수를 알려준다. 미로찾기가 시작된 것이다. 

가츠라역 안내소 직원이 알려준 “약사탕전” 정류소(왼쪽)에 내리니 주변엔 물어볼 만한 가게도 없고 사람도 구경하기 어렵다.

안내소 직원이 일러준 대로 가츠라역을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한적한 시골길을 20여 분 달리다 약사탕전 버스 정류장에 달랑 내리고 보니 무덤으로 가는 방향을 알 길이 없다. 안내 표지판 하나 없는데다가 길가는 사람도 거의 없는 한적한 곳에서 물어볼 사람은 더더욱 없다. 나침반 없이 깜깜한 길을 걷는 심정이 되어 무조건 내린 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처음부터 쉽게 무덤을 찾으리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방향감각도 없는 낯선 곳에서 과연 무덤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은 심정이었다. 국도변에는 민가도 가게도 없다. 한참을 국도를 따라 걷다 보니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러브호텔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라도 들어가 길을 물어보자.”라며 일행은 단체로(?) 모텔 안으로 들어가 보았으나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사람 기척이 없다. 모두 무인모텔이었던 것이다.
 
하는 수없이 다시 나와 걷다 보니 반가운 고등학교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기쁜 마음에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고등학교 수위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웬일인가 싶은 백발 수위아저씨는 “에…. 지나쳐 왔지라우…. 여기가 아니고라우…. 쩌그... 건너편 산 중턱 보이지라우. 거길 가려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아뿔싸!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던 것이다.
 
교토 토박이말인데다가 사투리가 심한 수위 할아버지 말의 절반밖에 알아듣지 못한 우리는 아까 지나갔던 러브호텔을 다시 지나 반대편으로 또 얼마를 지나서야 가츠라역 안내소 직원이 잘못 가르쳐준 것을 알았다. 하긴 안내소 직원인들 생전 찾아본 적이 없는 고야신립 무덤을 옳게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백제여인 고야신립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1,000여 년의 세월임에랴! 1시간여를 헤맨 끝에 무덤으로 가는 길은 우리가 내렸던 약사탕전 정류장이 아니라 한 정거장 전인 구츠카케에서 내려야 찾기 쉽다는 것과 구츠카케 주변에는 꽃집이 없어 꽃을 바치고 싶은 사람들은 가츠라역 구내 꽃집에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무덤이 있는 구츠카케는 우리나라 청도처럼 감의 고장이다. 마을 곳곳에는 감나무가 즐비하고 마을 어귀에는 먹음직한 감을 주인도 없이 무인가판대로 파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지(大枝, 오오에)는 감의 고장, 어디나 감이 널려 있고 무인 판매대도 많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무덤 들머리 돌비석 “환무천황어모어능참도(桓武天皇御母御陵參道)”를 발견하고 우린 그만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정유재란 때 조선인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 앞에서도 그랬고 광륭사 “미륵상” 앞에서도 우린 같은 눈물을 흘렸었다.
 
마치 잃어버렸다 찾은 자식이라도 만난 양 가늘고 기다란 돌비석을 어루만지며 감격의 기쁨을 느낀 것도 잠시였다. 돌비석 둘레를 살펴보니 무덤으로 나있는 허름한 흙계단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듯하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흙계단을 따라 무덤을 향해 산 중턱으로 오르는 길도 관리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너져 내리는 어머니 고야신립 무덤 오르는 길(왼쪽)과 아들 간무왕 사당 안의 호화로운 정원 안내판 (오른쪽)
고야신립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컴컴하다.

얼마큼 올라가야 무덤이 나오는 것인지 알 수없는 참배길 양옆에는 빽빽한 대나무가 하늘을 가려 대낮에도 어두웠다. 칙칙한 계단을 오르는 우리 마음은 무거웠다. 그런 마음을 아는 듯 대나무 숲 사이로 늦가을의 바람 한 자락이 콧등에 맺힌 땀을 씻어준다.
 
얼마큼 올랐을까?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일행의 발걸음은 무겁고 등줄기엔 땀이 흐른다. 쉬었다 가고 싶단 생각을 할 때쯤 되어 대나무 숲은 끝이 났다. 시야를 가리던 대나무 숲을 벗어나니 10월의 푸르른 하늘이 드러났다. 바로 저만치에 고야신립의 무덤이 보인다. 마지막 경사진 계단을 단숨에 올라 열쇠가 굳게 채워진 고야신립 무덤 앞에 섰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의 후손들이 먼 이역 땅까지 찾아 와준 고마움을 나타내는 것인지 무덤가엔 어디선가 날아온 아름다운 새들이 지저귄다. “고닌천왕의 왕비”라고 쓴 무덤 표지판 뒤로 난 울창한 숲은 고운 수를 놓은 듯 울긋불긋 단풍이 곱다. 우리는 준비해간 과일과 술을 따라 무덤 앞 계단 위에 놓고 고향집 부모 산소라도 찾은 듯 큰절을 올렸다. 술잔에 어리는 푸른 하늘은 1,200여 년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아! 세월이여! 여인이여!
   

고야신립 무덤 앞에 세워진 안내판, 대지릉(大枝陵)이라고 쓰여 있다. 분명한 것은 일본 왕실을 관리하는 관청인 궁내청이 이 무덤을 관리한다.
간무왕 생모 고야신립의 초라한 무덤, 꽃을 사지 못해 대신 감 등 몇 가지 음식물을 차려놓고 묵념을 했다.
백제여인 고야신립은 50대 일본왕 환무왕(桓武天皇, 간무)의 생모이자 49대 광인왕(光仁天皇, 고닌)의 왕비이다. 멸망한 왕국 백제의 왕손이었던 고야신립은 조정의 반대로 정실부인에 오르지 못한 채 간무왕을 낳고 오랜 세월 음지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62세로 왕위에 오른 남편 덕에 일약 왕비가 된 여인이다. 아니 어쩌면 고야신립이 남편을 왕위에 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간무는 남편의 뒤를 이어 50대 왕위를 물려받았고 이후 두 손자가 역시 왕위를 물려받았다. 남편, 아들, 손자에 이르는 왕위는 곧 고야신립이 참고 견뎌낸 고통의 세월에 대한 보상이요 멸망한 백제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교토의 오야가미(祖神, 조상신)”로 불리는 간무왕은 누구인가?

화려하고 웅장한 간무왕 사당인 헤이안신궁 대극전(가운데)과 창룡루(오른쪽), 백호루(왼쪽)

“일본의 천년고도 교토는 메이지(明治) 이전까지 1천 년 동안 일본의 서울이었다.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정치, 문화를 꽃피운 왕은 간무왕으로 그는 재위 25년 동안 법률정비, 난민구제, 교육 문화 진흥에 힘썼으며, 나라의 발전을 위해 국내정치와 국제교역에도 힘썼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헤이안시대(794~1185)의 기초를 다진 간무왕을 교토시민들은 헤이안 천도 1,100돌을 기념하여 교토의 조상신으로 모시기로 하고 1895년 헤이안 신궁을 창건하였다.”
 
헤이안신궁 누리집(www.heianjingu.or.jp)에는 간무왕의 인자한 모습과 함께 헤이안신궁의 유래가 적혀있다. 특히 지난 2005년에는 간무왕의 헤이안 천도 1,200돌 행사가 교토에서 성대히 이뤄졌다. 일본인들이 '간무왕을 교토의 조상신(祖神, 오야가미)'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면 간무왕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위대한 왕 간무왕을 낳은 사람은 누구일까?
  
<다음은 제5부 제3편 “49대 고닌천황, 백제여인 고야신립과 사랑에 빠지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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