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조 시인.
정삼조 시인.

[뉴스사천=정삼조 시인] 유난히 더운 올여름을 겪다 보니, 옛날 국어책에서 읽었던 이희승 선생의 수필 「딸깍발이」가 생각난다. 신발이 나막신밖에 없어 마른 날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그 신발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딸깍딸깍 나서 별호가 딸깍발이가 되었다는, 퇴락한 양반들인 남산골샌님 이야기다. 먹을 양식도 융통할 길이 없는 터에, 더위 추위를 피할 방책이야 당연히 마련할 주제가 못 되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그런 일로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얼어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엄동설한에 바깥이나 별 다를 바 없는 방 안에서 추위에 떨며 기껏 하는 말이, ‘요놈,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더위가 있으면 추위도 있다. 그리고 더위를 물리치고자 하는 생각에 굳이 애써서 말하자면 해마다 겪는 그 추위가 사실은 멀지도 않았다. 가을이 들어선다는 입추(立秋)가 바로 닿았고, 막바지 더위라는 말복도 다가오고 있다. 조금만 참으면 저절로 물러갈 운명에 놓인 더위다. 그러니 ‘이 더위란 놈, 조금만 있다 보자’하고 남산골샌님 흉내 내며 이 더위를 잠시 잊어보면 어떨까.

그런 뜻에서 장만영 시인(1914∼1975)의 시 「달, 포도, 잎사귀」를 함께 읽어 보았으면 한다. 비닐하우스의 덕인지 몰라도 요즘 시장에는 철 이른 포도가 한창이다. 그런데 이 시에 보면 포도가 익는 계절이 가을이다. 이육사의 시에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고 했으니 포도의 제철은 이맘 시절이나 아니면 조금 더 지나, 여름과 가을의 그 경계에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어쨌든 포도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여름도 막바지라고 보면 되겠는데, 이 시는 그 서늘해지는 가을밤의 정취를 눈에 보이듯 멋스럽게 그린 시로 알려졌다. 장만영 시인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이라 하고, 시인은 온천 등을 경영한 부친을 둔 덕분에 유복한 삶을 살았다 한다. 서울과 일본에서 수학하였다. 이 시는 저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다는 평안북도 중강진에서 1936년부터 발행한 시지 『시건설』에 실린 시라고 전해져 이채롭다. 시 전문을 인용한다.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닷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고나”

  순이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착한 여성을 평범하게 부르는 말로 여겨지는데, 시인의 마음속에 오래 간직되었던 어떤 여성상일지도 모르겠다. 더위 끝, 포도가 익어가는 초가을 시원한 달밤을 이 시로 맛보면 좋겠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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