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묵시默示하는 시어들 1

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사람은 하루를 살면서 혹은 평생을 지내면서 어느 만큼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될까요? 낮 동안에, 밤중에, 꿈을 꾸면서, 주위의 여러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는 삶의 종착역이라 할 죽음의 형상을 끊임없이 만납니다. 적어도 살아있고 숨을 쉬는 한 피할 수 없고 뗄 수 없는 신체의 생리현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삶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기피하고 증오하며 심지어 적대시까지 합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죽음을 모면한다면 다행스럽겠지만 현실은 그러한 의도를 조금도 반영하거나 수용하지 않습니다. 삶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은 누구라도 죽음이라는 통과 의례를 생략하거나 삭제할 수 없습니다. 슬프고 안타깝지만 생멸生滅 현상은 자연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슬픔이나 안타까움에 젖어 머뭇거리는 시간보다 우리가 만나야 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왜 꾸리느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진작부터 마음의 준비를 한다면 이별의 상처와 고통보다는 살아온 지난날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기쁘고 고맙게 느끼는 여유로움이 분명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십 초반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세 아낙의 시를 봅니다.    

나의 미소가 / 한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걸 알고 난 후 / 나의 여생이 바뀌었다 / 백날을 함께 살고 / 백날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공기마저 온기를 잃었다 / 초점 잃은 눈동자로 / 내 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우리의 세상을 펼쳐보기도 전에 / 아뿔싸, / 나는 벌써 죄인이었구나 / 한 사람에게 남겨줄 건 상처뿐인데 / 어쩌랴 / 한사코 막무가내인 저 사람을…… // 백날을 함께 살고 / 일생이 갔다              
            - 배영옥 「여분의 사랑」 전문

타인에게는 아픔이 됨을 헤아리지 못한 나의 미소는 나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합니다. 예상치 못한 데에서 불쑥 인생 전환점을 맞습니다. 방황하고 고뇌하는 시간이 이어지면서 무엇 하나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지각 기능을 잃고 육신은 오리무중에 갇혀 혼돈의 늪 깊숙이 허우적거립니다. 인식 불가 상태에 이를 만큼 깨달은 충격은 큽니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우쳤을 때는 ‘잘못의 발생’으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진 뒤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죄일까요 죄 아닐까요? 꽤나 흥미로우면서 고민이 담긴 물음입니다. 갈등에 시달리는 당사자라면 한층 심각한 문제일 겁니다. 그렇다고 사랑무죄, 사랑유죄를 논하자는 얘기는 아니고요. 다만 사랑을 죄의 유무로 따지는 것이 어째 예쁘지도 않고 미덥지도 않습니다. 탐탁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그저 사랑일 따름입니다. 아가페를 지향하든 에로스를 지향하든 그것은 오롯이 사랑을 하는 자신의 몫입니다. 

어쨌거나 사랑을 담은 잔을 엎질렀습니다. 상처는 누구의 몫이고 누가 져야 할 짐인지는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더욱이 죽음을 예견한 듯 과거를 떠올리며 되뇌는 시인의 넋두리 같은 마지막 고백은 비장미를 마구 풍겨 댑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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