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사천의 마을 숲 ⑩

코로나19로 새삼 깨닫는 것이 숲의 소중함이다. 특히나 마을 숲은 역사가 깊으면서도 늘 사람들 곁에 있어서 삶의 희로애락이 짙게 밴 곳이다. 숲 해설가와 함께 사천의 마을 숲과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 편집자-

사남면 우천리 능화마을에 있는 능화숲. 고려 현종의 애절한 부자(父子) 이야기를 품었다.
사남면 우천리 능화마을에 있는 능화숲. 고려 현종의 애절한 부자(父子) 이야기를 품었다.

[뉴스사천=박남희 시민기자/숲 해설가] 능화숲은 사남면 우천리 능화봉 아래 능화마을에 있는 숲이다. 마을숲 치고는 규모가 있고 나무의 종류도 다양하다. 수령이 100년에서 150년 사이인 서어나무 13그루가 있고 수령이 150년 정도인 말채나무도 두 그루 있다. 그 외에도 느티나무, 소나무, 팽나무 등이 서로 하늘을 가리며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수십 년 전 만 하더라도 수백 년 수령을 자랑하는 아름드리나무가 많았으나 태풍 셀마, 루사 등이 할퀴어 쓰러지거나 쓸려나갔단다. 그래서 숲의 규모도 절반으로 쪼그라들었단다.

능화숲은 여느 숲보다 평평하고 너른 마당을 지녔다. 웬만한 운동 경기도 충분히 할 정도다. 실제로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줄을 매달고는 배구를 즐겼단다. 숲의 품이 얼마나 넉넉했던지 아랫마을, 윗마을 사람들까지 다 모였단다. 능화숲의 또 다른 특징은 숲 가운데로 물길이 있다는 점이다. 이 물길은 그저 흐르는 도랑물 이 아니라, 샘솟는 물이다. 샘물의 특징은 여름에 차고 겨울에 따뜻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사랑받았을까. 빨랫방망이를 두드리며 이야기꽃을 피웠을 아낙들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길쌈용 큰 솥을 걸고 삼을 삶아 내던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능화숲은 안쪽에 널직한 공간을 지녔음이 특징이다.
능화숲은 안쪽에 널직한 공간을 지녔음이 특징이다.

능화마을은 임금의 능지(陵地)에서 ‘능’ 자를 따고 꽃밭등(花田)의 ‘화’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조선 성종 때 창원 구씨의 4대 조가 들어와 집성촌을 형성해 대대손손 뿌리를 내리며 살아왔다. 능화마을은 무엇보다 고려 현종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현종의 아버지인 왕욱(王郁)이 사천으로 유배를 오자 그의 아들 왕순(王詢)도 아버지를 따르게 되는데, 부자(父子)가 한곳에 머물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한참을 걸어 아들을 만나곤 했다. 이때 산을 넘던 고갯마루가 고자치(顧子峙)이다. 오늘날 사천시는 아버지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걸었던 그 길을 ‘부자상봉길’이라 이름 지었다. 왕욱이 죽음에 이르자 아들에게 자신을 꽃 밭등에 엎어서 묻어달라고 했음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정말로 그 덕분이 었는지 뒷날 왕순은 고려 8대 임금(현종)에 오른다.

그런데 능화숲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마을 사람들은 고려 현종과 그의 아버지가 살았을 때부터 숲이 존재했으리라 여긴다.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풍수지리에 밝았다는 점에서다. 그런 차원이라면 이 숲은 비보림(裨補林)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하천 대부분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지만, 능화마을 앞을 지나는 죽천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든다. 예로부터 주민들은 역수(逆水)를 다스리지 못하면 복을 얻기가 힘들다고 믿었다. 강물이 돌아 빠져나가는 모습을 마을에서 곧장 마주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여겼으니, 숲을 두어 가리곤 했다. 숲은 거친 물길도 막아주고, 세찬 비바람으로부터도 마을을 지켜 준다.

능화숲은 풍패지향(豐沛之鄕) 고려 현종의 애절한 부자(父子) 이야기를 품은 곳이다. 그만큼 역사가 깊어서 눈길이 간다. 마을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해마다 열고 있다. 반면에 여름철 한때를 빼면 숲을 찾는 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모양이다. 마을 사람들의 조용한 쉼터로 쓰이는 것도 좋을 일이지만, 더 많은 사람이 능화숲의 가치를 깨닫고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알려 나가는 일도 나쁘지 않겠다. 정성을 모아 숲의 옛 정취를 살려내는 일도 참으로 기쁘겠다.

※이 글은 사천시 녹지공원과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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