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다시 돌아보는 사천의 3·1 만세운동

매년 3월 21일에 사천초등학교, 사천읍 일원에서 열리는 기미독립만세 재현행사 모습.(사진=뉴스사천DB)
매년 3월 21일에 사천초등학교, 사천읍 일원에서 열리는 기미독립만세 재현행사 모습.(사진=뉴스사천DB)

[뉴스사천=김상엽 기자]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기미독립선언서 첫 부분-

올해는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3년째 되는 해다. 3·1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한일병합조약 무효와 독립을 선언하며 일으킨 비폭력 만세운동이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1214회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고 <실록친일파>(임종국 지음)에 기록돼 있다. 

사천에서도 이런 대규모 만세운동에 함께 했었다. 학교와 장터, 공사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학생과 상인, 농민, 노동자, 지식인 등 직업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참여했다. 사천 곳곳에서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사천지역 만세운동의 시작

사천지역 만세운동은 곤양면에서 시작됐다. 서울 경기고보 학생이던 최원형(서포면 맥사리 출신)은 3·1운동이 서울에서 처음 일어나자, 수많은 학생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그 직후 독립선언서를 간직한 채 고향으로 내려와 당시 해인사 지방학림의 학생이었던 효당 최범술 등에 전달했다. 최범술은 해인사 동학들과 함께 만여 매를 인쇄하여 합천·의령·진주·사천·곤양·하동 등 일대의 책임을 맡아 배포하면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일제 고등경찰관계적록에 따르면, 1919년 3월 13일 곤양면 송전리 출신의 김진곤 외 4명이 백지에 태극기를 그리고, 한쪽에 ‘독립 만세’라고 쓴 기를 들고,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천시사에서는 “곤양의거는 진주의거보다 5일, 사천읍 의거보다 8일이나 앞서 곤양에서 일어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범술은 송지환·신영범·임응주·송찬홍·이주효·송수안·송용수·박우미동 등과 함께 곤양 장날인 3월 중순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졸업식 날 이어진 만세운동

곤양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사천읍에서도 계속됐다. 당시 천도교 사천교구 책임자였던 장태영(사천시 이금동 봉전 출신) 역시 독립선언문을 버선 속에 숨겨 고향으로 돌아와 강대창, 황순주, 박기현 등에게 전했다. 이들은 사천공립보통학교 졸업식인 3월 21일을 만세운동 거사일로 정하고, 200여 장의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만들었다.

21일 졸업식이 끝난 후 식후행사인 축구 시합을 하기 위해 학생들은 모두 운동장에 모였다. 이때 이윤조의 주동으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만세 시위가 전개됐다. 학생들은 읍민들과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으나 헌병대의 출동으로 만세 행렬은 차단됐다. 선두에서 지휘하던 여러 학생이 체포됐다. 읍민과 학생 시위를 주도했던 황순주, 박기현 등은 사천헌병 분대장 집에 격문을 투척하기도 했다.

매년 3월21일이면 사천초등학교 운동장과 사천읍시장 일원에서 기미년 독립만세재현행사가 펼쳐진다. (사진=뉴스사천 자료사진)
매년 3월21일이면 사천초등학교 운동장과 사천읍시장 일원에서 기미년 독립만세재현행사가 펼쳐진다. (사진=뉴스사천 자료사진)

삼천포 장날에 외친 ‘독립 만세’

삼천포에서도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시사에 따르면, 3월 25일에는 삼천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위 운동이 전개됐다. 남양면 출신 박종실은 진주의거 주동자인 강달영·박진환 등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입수했다.

그는 삼천포공립보통학교 교사인 황병두와 더불어 삼천포의거를 모의했다. 25일은 삼천포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식이 있는 날이면서 삼천포 장날이었다. 이날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며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삼천포 장날 장터 중앙에서 강금수(현 사천시 동서동 출신)가 독립선언서를 읽자 수백 명의 군중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1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했고, 수백 명의 군중이 합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4월에도 계속된 만세운동

사천지역의 만세운동은 4월에도 계속됐다. 4월 5일 곤명면 금성리에서는 시골 선비 이영근의 주도로 주민 200여 명이 함께 독립 만세운동을 펼쳤다. 4월 17일에는 곤명면 정곡리 김경찬 등이 완사 주민들을 규합, 옥녀봉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4월 6일과 4월 19일에는 곤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곤양 장날에 모인 군중이 독립 만세를 이어갔다.

최범술은 4월 10일과 16일 서포개진학교 생도와 주민들 100여 명을 규합,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운동을 주도했다. 1968년께 서포초등학교 교정에는 3·1의거비가 세워졌다.

4월 14일에는 중선포의 도로공사부역을 마치고 귀가하던 류승갑 등 100여 명이 읍내에서 만세 시위를 펼쳤다.

한편, 매년 3월 21일에 사천초등학교에서 열리던 ‘기미독립만세 재현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해 올해로 3년째 취소됐다. 이 행사는 1919년 3월 21일 사천공립보통학교 졸업식을 기념하는 축구대회에 모인 학생들이 가슴에 품고 있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의거를 기리기 위한 행사다. 사천초등학교 교정과 사천읍 일원에서 치러지는 재현행사는 사천초 학생들 외에도 동성초, 수양초 학생들, 시민 등이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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